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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을 쓰고 역사를 기록하다 청년 시절 상경하여 빼어난 시작(詩作) 활동을 하며 문사들과 교유하니 이건창, 김택영과 함께 한말 삼대 시인으로 일컬어진 매천이 특설보거과에 응시하여 1등 했으나 시골 출신이라고 2등으로 낮추고 끝내 떨어뜨리는 잘못된 현실에 부딪혀 실망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만수동에 은둔했을 때도 아버지의 뜻을 차마 저버리지 못하고 다시금 식년 생원시에 응시하여 1등 입격으로 성균관 생원이 되었지만 곧 그만두고 귀향했다. 세속의 미련을 버린 매천은 서재 구안실을 마련하고 제자를 양성하며 문장가로서 꽃을 피웠다. 그가 쓴 시 2,500여 수 중 다수와 망국의 격동기를 엄정한 역사정신으로 기록한 『매천야록」 「오하기문」 「동비기략」 그리고 국정 개혁 방안을 담은 상소문 등을 구안실에서 집필했다. 만수동에서 구례읍 가까운 월곡으로 이사한 매천은 세상의 변화에 "참여를 꾀했다. 하지만 을사늑약으로 국권이 기울어가는 슬픔을 당하여 식음을 전폐하고 비분강개함으로 붓을 들어야 했고, 중국으로 망명하라는 권유도 따르지 못하는 처지였다. 이에 구례 유지들과 함께 신학문의 효시인 호양학교를 설립하여 새로운 인재 양식을 통해 나라를 구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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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학행일치, 순국으로 빛나다. 아 경술년. 한일병탄 소식을 접한 매천은 "글 아는 사람 구실 진정 어렵다" 하는 절명시 4수와 함께 자제들에게 당부하는 글로써 “나라가 망하는 날을 당하여 한 사람도 책임지고 죽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가슴 아프지 아니한가” 하는 탄식을 남기고 장렬하게 음독 순절했다. 결연한 선비의 절의를 보이고 글과 삶을 일치시켜 죽음으로써 강력하게 항일운동을 한 매천을 추모하며, 당시의 지식인 158명이 애사(哀詞)를 쓰고 39명이 제문을 지어 슬픔을 표했다. 문(文) 사(史) 절(節) 세 봉우리를 한 몸에 갖춘 겨레의 위인 현실을 직시하고 풍자한 문장가요. 그 시대를 생생하고 정확하게 기록한 역사가며, 나라의 운명을 따라 당당하게 목숨을 던진 지조 높은 선비 오로지 매천 황현, 그 홀로 이룩한 고결한 삶이 영롱하게 빛난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조선의 마지막 의로운 선비로 추앙받는 매천 황현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고, 1999년 8월의 문화 인물과 2005년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2002년 광양시에서는 서석마을에 생가를 복원했고 순국 100주년을 맞아 추모 사업을 펼치며 숭고한 뜻을 기념하고 후세의 귀감으로 삼고자 글을 새기는 바다. 2010. 9. 10 광양시 매천 황현 선생 추모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