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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천 황현 / 梅泉 黃玹 문(文) 사(史) 절(節)을 한 몸에 갖춘 애국지사 1855(출생) 광양시 봉강면 석사리 서석에서 황시묵과 풍천 노씨의 장남으로 태어나다 1865(11세) 구례의 왕석보에게 수학하며 그의 자손들과 관계하다 1869(15세) 조선 후기 대유학자 기정진을 찾아가니 애틋한 심정이 담긴 시를 써주다 1878(24세) 서울에서 어울리던 이건창, 김택영과 함개 한말삼재(韓末三才)로 알려지다 1883(29세) 보거과에 1등했으나 2등으로 낮추더니 끝내 떨어뜨리자 낙향하다 1886(32세) 광양에서 백운산 너머 구례 간전면 만수동으로 이사하다 1888(34세) 성균관 생원시에 1등하여 진사가 되었으나 출세를 접고 바로 귀향하다 1830(36세) 만수동에 구안실(苟安室)을 세워 저술 활동에 매진하며 후학을 길러내다. 1902(48세) 구례읍 가까운 광의면 월곡으로 이사하고 현실 참여를 피하다 1905(51세) 을사늑약 소식이 전해지자 식음을 전폐하고 비분강개함을 시로 남기다 1908(54세) 구례 유지들과 함께 호양학교를 세워 교육 계몽운동에 나서다 1910(56세) 한일병탄의 충격을 당하여 절명시 4수를 남기고 순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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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산 자락에서 의기를 벼리다 매천은 백두대간 끝자락에 우뚝한 백운산의 남서쪽 문덕봉 아랫마을 서석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상업 활동을 하여 재산을 모았고 그 재력으로 자손과 이웃 선비들을 학업의 길로 이끌었다. 그의 아버지도 교육열이 높아서 1천여 권의 책을 마련하여 학문을 북돋았다 매천은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여 어떤 글이라도 한 번 읽으면 기억했고, 책에 몰두하면 침식을 잊었으며, 서당에 다니면서 또래 학동들을 가르쳤다. 매천은 십대 초반에 백운산을 넘어가 구례 천변마을에서 호남시단을 새롭게 연 왕석보에게 수학했고, 향사와 백일장에서 뽑힌 글이 사람을 탄복하게 하여 광양의 황신동으로 알려졌다. 당시 장성에서 노사학교를 형성한 대유학자 기정진을 찾아가 학문을 묻고 사상을 고감했는데, 노사는 비범한 재질을 살피고 매천에게 기대와 애틋함이 담긴 시를 써주었다. 삼십대에 어른 매천은 출세의 뜻을 접고 서석에서 백운산 뒷자락인 구례 만수동으로 옮겨가 세상이 어지러울 때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는 유교적 군자의 길을 택했다. 이렇게 백운산 자락은 매천이 학문을 가다듬고 더쪽 같은 선비로서 의기를 버린 터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