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彰義亭記(창의정기) 광양의 진산(鎭山)인 백운산이 세 간맥(幹脈) 을 이루어 그 중 서산맥이 아래로 내려오다가 책상을 펼친 듯한 모습으로 수기(秀氣)를 발하는 봉우리를 이루니 문성산(文星山)이다.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라, 그 산 아래서 인재가 배출되었으니, 구한말의 의사(義士)인 매천(梅泉) 황현(黃玹) 선생은 산 남쪽 석현(石峴) 마을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희세의 자품(資稟)으로 독실하게 면학하여 학문을 대성하였다. 특히 시에 천부의 조예가 있었으니, 이십대 중반에 상경하여 당대의 명류인 이건창(李建昌), 김택영(金澤榮) 등과 교유하여 한말삼재(韓末三才)의 칭을 얻었다. 삼십대 초반에 구례로 이주하여 학문과 육영에 전념하다가 등과(登科)를 원하는 부친의 뜻을 따라 생원시에 응시하여 일등으로 급제하였지만 벼슬에 뜻이 없어 귀향하여 저술에 몰두하였다. 국이 쇠하여 을사늑약(乙巳勒約)을 당하자 문변삼수(聞變三首)와 오애시(五哀詩)를 지어 울분을 달랬고, 경술국치(庚戌國恥)에는 절명시사수(絶命詩四首)를 남기고 음독 자결하니 향년 오십육 세였다. 김택영은 경술국치에 자결한 열다섯 의사(義士)중 문학으로 매천선생이 가장 저명하다고 평하였는데 이는 선생이 시문에 뛰어났음을 알려준다. 뿐만 아니라 선생은 역사에 대해서도 탁월한 식견으로 여러 저술을 남겼으니 우리 역사상 문학과 사학과 절의를 전한 인물은 오직 선생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선생은 사후 구례의 유산(乳山)에 안장되었다가 광복 전에 문성산 선영 아래로 이장되었는데, 광양시에서는 순국 일백주년을 맞아 매천 선생 순국백주년추모사업추진위원회를 발족하고 이성웅(李聖雄) 시장과 의송 박태상(毅松 朴泰相)이 공동위원장 직을 맡아 묘역을 개수하고 상비(床碑)를 교체하여 면목을 일신하였다. 또 묘역 일대에 매천역사공원을 조성하려는 계획을 세워 연못을 파고 그 옆에 정자를 세웠는데 절의를 빛나게 한다는 뜻에서 이름을 창의정(彰義亭)이라 하였다. 향후 사당과 문사 절의관(文史節義館)의 건립도 추진하고 있으니 선생의 절의를 기리는 데 만전을 기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많은 참배객이 선생의 묘와 사랑에 배하고 문사절의관을 참관한 뒤, 잠시 이 정자에 앉아 절명시를 음송하고 선생의 절의를 추념하면서 위민애국(爲民愛國)하는 삶을 살겠노라 결의하게 될 것이니 이를 보는 선생의 유혼(幽魂)도 정녕 기뻐할 것이다. 2010년 경인 11월 상완(上浣) 문학박사 서울대학교 교수 이영주(李永朱) 찬(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