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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황공의 휘는 병학, 자는 영문, 본관 창원. 고종 13년 서기 1876년 1월 11일 부 재묘, 모 순흥안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맏형 병중은 간재 전우, 면암 최익현 선생과 함께 척사위정론을 부르짖었고 고암집을 편집하여 충효정신을 후손에 알렸다. 1905년 일제 강압으로 을사조약의 체결과 함께 국운이 백척간두에 놓이자 의사는 조국의 비참한 상황을 좌시할 수 없어 1908년 7월 의병 수백명을 규합하여 광양군 백운산에 호남창의대장기를 게양한 뒤 동 8월 왜적의 본거지인 망덕만을 기습하여 다수 적병을 사살하고 왜선을 불태우고 총기등을 박탈하였다. 동 9월 의사는 창의대를 공격코자 따로 배치된 광양헌병분견소의 왜적과 오곡원후산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의사는 총상을 입었으며 동 10월에는 계속 되어온 교전으로 창의대의 황순모, 한성순, 김헌백 열사들이 체포 총살당하는 등 그밖에도 수많은 동지들이 왜적의 총탄에 쓰러졌다. 이미 죽음을 각오한 의사는 끝까지 사투를 계속하였으나 병력, 장비등의 큰 격차로 동지들의 희생이 과중함을 감안하여 일단 잠복세를 취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919년 기미년 3.1운동의 봉기와 함께 임시정부 국민대회 전라도 의무금 모집단을 조직하였고 동년 가을 만주에서 다시 독립군을 조직하여 영고탑, 용정, 흑룡강 흥개보 등지에서 왜적을 기습산발전을 하였다. 1923년 계해년 대한민국 상해임시정부의 비밀명령을 받고 국내에 잠입도중 의주에서 체포되어 평양형무소에 투옥 3년의 옥고를 치르고 1927년 병구로 출옥하였으나 1931 신미년 4월 23일 조국광복의 새날을 보지못한 한을 길이 품은 채 55세를 일기로 운명하였다. 의사가 처음으로 백운산에 창의대장기를 게양했던 190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