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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벌대가 편성되어 의병 100명과 옥곡원 후산에서 맞붙은 치열한 전투에서 황병학은 허벅지에 관통상을 입고도 의병작전을 지휘 독려하여 다수왜적을 사살했으나 의병 13명도 희생되었다. 1908년 10월 황순모 한규순 이찬주는 일본군에 체포되어 총살 순국하였고 1909년 1월 23일 의병 50명은 의병을 토벌할 목적으로 병력이 증강된 광양헌병분견소를 야간에 기습하여 총 10정을 획득했다. 1909년 7월 19일 일본군은 백운산의병기지를 강력히 압박해 와서 더 이상 의병활동이 어려워 의병 100명이 의병기지를 백운산에서 묘도로 이동 중 일본군과 해상전투가 벌어져 백학선 등 많은 의병이 전사했고 황병학 등 50명은 여천군 삼일면으로 탈출했다. 일본군이 1909년 9월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을 전개함에 따라 더 이상 활동이 어려워 의병을 해산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김응백은 일본군에 체포되어 1910년 11월 대구공소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순국했다. 그 후 황병학은 여수 순천 고성 등지로 피신하다가 1919년 고흥인 기산도와 함께 상해 임시정부 독립운동자금을 모집 전달하다가 종로경찰서에 발각되어 1920년 7월 19일 광주지방법원은 황병학 징역 3년형을 선고했다. 황병학은 1919년 11월 임시정부 교통차장 김철의 도움으로 만주로 망명 용정 영고탑 흥개호 흑룡강 등지에서 독립군부대에 가담 전투 활동을 전개하다가 1923년 상해 임시정부의 군자금 모집 지령을 받고 국내에 잠입도중 신의주에서 헌병대에 체포되어 1923년 10월 24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아 평양형무소에서 4년여의 옥고를 치르고 1927년 출옥하여 옥고의 여독으로 1931년 4월 23일 55세를 일기로 영면하였다. 정부는 황병학 건국훈장 독립장 황순모 애국장 김응백 독립장 백학선 애국장 한규순 애국장 이찬주 애국장을 추서하였고 1977년 황병학의 묘소를 광양에서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