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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옥의 내력과 정병욱 부모 이야기 남도 선비가 짊어진 시대의 질곡과 겨레의 염원 1925년 점포형 주택으로 지어진 이 가옥은 정병욱 선생 일가가 터를 잡은 것은 1930년 무렵, 부친 남파 정남섭선생 때 일이다. 남파 선생은 일찍이 고향 남해군에서 20세의 나이로 원로 유림들과 함께 3.1독립만세운동을 창도하여('남해3.1운동발상기념탑'에 기록) 일제 경찰에 쫓기는 처지가 되자, 주위의 강권에 의해 사범교육 과정을 밟는 조건으로 당시의 혹심한 옥고를 면하였다고 한다. 그 후 선생은 1922년 경상남도교원양성소(뒷날의 진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거제와 하동에서 일시 교편을 잡기도 하였으나, 일제 치하에서 마음 편한 교직이 아니었으므로 몇 해 후 사직하고 가산을 기울여 광양의 이 가옥에서 양조 등의 사업을 하게 된다. 지역의 명망을 얻은 선각자로서 광복 후 미군정 시기에 이곳에서 진월면장(1946~48)을 역임하기도 하였던 선생은, 일제의 징병에 끌려가게 된 큰아들의 소원에 따라 부인 밀양박씨 아지 님(정병욱선생 모친)과 함께 위협을 무릅쓰고 윤동주의 시고를 이곳에 보존하여 후대에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넘겨줄 수 있게 한 숨은 공로자이다. 북간도 개척민의 후손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을 노래한 시가 일제의 탄압 속에 햇빛도 보지 못한채 남도 선비 집안의 가옥에서 지켜지다가 해방 후 햇빛고을 광양가옥에서 소생하게 된 것은 모진 세월을 견딘 겨레의 시련과 염원이 조국 강산 남북 어디서나 한결같았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