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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박공문용 기적비 이 비는 보성군 출신으로 독립운동에 앞장선 박문용의사의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1982년 5월에 건립되었으며 1996년 7월 이곳으로 이설하였다. 박문용의사는 1913년 12얼 8일 보성군 겸백면장으로 재직함을 이용하여 면내 공금 보관금 327원 6전을 가지고 조국독립운동에 뜻을 품고 중국 상해로 건너갔다. 이곳에서 그는 임시정부 수립을 적극 지원하였으며 1919년 7월에는 안창호와 함께 조국의 독립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운영상태등을 논의하기로 하였다. 같은 해 4월 18일에는 천진에서 동지들과 같이 불변단을 조직하였으며 동년 8월 15일의 임원개선시에는 부단장겸 의사부장의 직책을 맡아 항일투쟁을 계속하였으며 동년 10월 31일에는 상해에서 박은식등 민족대표와 함께 선언서와 공약을 발표하여 우리도 정부있는 국민임을 세계에 선언하여 전 민족의 분발, 협력을 추구하였다. 그후 그는 상해임시정부의 국내특파원이 되어 전라도 지역의 책임자로 귀국하여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1919년 말 서울에서 한우석을 만나게 된 그는 1920년 2월말 한우석과 함께 다시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 간부들과 회견을 하여 서울을 중심으로 한 조선독립군사형부를 조직하도록 협의하였다. 동시에 군자금 모집을 위한 권총을 지원받아 동년 3월 7일에 귀국하였으며, 한우석 등 수명과 협의하여 모병, 모금을 목적으로 한 조선독립군사령부 결사대를 조직하였다. 그는 행동대원으로서 권총을 휴대하고 전라남도 광주 본촌면에서 군자금 모집을 계획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20년 8월 미국 상원의원단이 서울을 방문하게 되자 조선총독및 정무총감등 일본침략 수뇌부를 제거할 암살단을 조직하고, 그 준비 작업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일이 실천도 되기전에 한우석이 검거됨에 따라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그 자신도 체포되었다. 1921년 11월 1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강도살인 예비및 제령 제7호 위반과 총포 화약류 취체령 위반 사기죄로 징역 7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8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