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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하는 고향 예동은 옛부터 예를 숭상하는 사람들이 모여사는 아름다운 마을이다. 생각하면 가족애도 예요 또한 예인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삶을 얻었고 그 품에서 자랐을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이야말로 가장 큰 예이다. 여기서 예는 의의 경지로 승화하게된다. 예동사람들의 대의가 면목을 갖추게 된것은 바로 예동 삼일만세운동때문이었다. 우리 민족사에 삼일운동이 없었다면 겨레의 체면은 무엇일 될꼬 또한 예동만세운동이 없었다면 우리마을사람들에 어떻게 예를 표방할수 있었으리요. 서울에서 먼저 오른 독립만세운동의 불길은 순식간에 전국으로 번졌고 전라도 고을마다 우리 보성의 마을마다에서 터진 함성은 하늘을 찔렀다. 이 무렵 예동에는 작은 서당이 있었다. 광리 대소가의 자제를 가르치기위한 것인데 훈장도 학동도 모두 문중사람이다. 이 성의 이용의라는 학동이 서울에 다녀와서 서울의 독립만세소식을 상세히 전한것이 예동만세운동의 발단이 되었다. 1919년 4월 18일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손에 손에 들고 예동 사람들은 마을앞에 모여든다. 여기서 일단 기세를 올린후 행렬을 지어 곰재장터까지 진출하였다. 때마침 장날이어 사방에서 모여든 장꾼들과 합세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니 그 함성은 하늘을 찌르고도 남음이었다. 얼마후 보성읍내에서 달려온 일제헌벙들은 열살전후의 어린이까지 포함해 십여명의 주동인물을 검속해 끌고 가는 잔혹을 보였다. 예동서당이 강제로 폐쇄당했음은 물론이다. 예동만세운동이 유독 다른것은 서당 훈장에서 어린학동까지 노유가 함께 했고 신분의 차별이나 본동 근동 사람의 구별없이 거사를 성공으로 이끄는데 합심하였다는 사실이었다. 이와 같은 선인들의 의기에 감동하여 여기에 세우는 기념비의 건립비는 광주이씨 무구제공파 문중에서 감담하셨고 비문은 이강재가 지었고 비명은 운암 조용민이 썼다. 다음에 예동만세운동을 주도한 영령들의 이름을 새겨 삼가 그분들의 명복을 비는 바이다. 이병계 이용훈 이용성 이용한 이만재 이인갑 문오복 김두환 전인○ 이봉래 이용인 이용현 이용극 이승재 문대홍 문서복 한오성 고선○ 이용의 이용률 이용직 이범재 이인재 문길홍 김일문 한인준 조영조 이용도 이용이 이용학 이몽재 이경을 문도중 김로암 양청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