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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 우재 이병찬선생 동상 건립기 옛 대한제국의 국운이 기울어 밀려드는 일본의 세력을 막아내지 못하고 융희4년 서기 1910년 8월 나라가 일본에 합명되자 전국 방방곡곡에서 한을 이기지 못한 의사들이 일어나 향병을 모집하여 적과 싸우기도 하고 혹은 기호를 보아 적의 원흉을 저격하기도 하며 혹은 국외로 나가 동지를 규합 독립군을 결성하여 적과 대전하기도 하고 혹은 열강국을 찾아가 국권회복을 호소하는 다양한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이 고장 복내면에 방년 24세의 청년으로 분연히 조국광복에 헌신하여 호남의 대표적인 역할을 했던 분이 있었으니 바로 우재 이병찬선생이다. 선생의 또 다른 이름은 병호요 자는 성부이며 본관은 광주인으로 고려말의 명현 둔촌선생 집의 후예요 입향조 양진재공 수관의 12대손이며 심재공 정회의 장남이다. 학령에 이르러 조선조말 월파 정시림선생 문하에서 수학하던중 망국의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은인자중하던 차 만주에서 애국지사들의 광복운동이 일고있다는 소식을 듣고 비밀리에 그들과 접선하였다. 선생은 1913년 채기중선생이 주도한 풍기의 대한광복단과 1915년 박상진선생이 주도한 조선국권회복단에서 활약하다가 1915년 7월 15일 박상진 우재룡선생과 함께 대구달성공원에서 대규모로 조직을 정비하여 대한광복회를 결성하고 전국에 비밀기관을 설치 운용키로 하였는데 여기서 선생은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전라도 지부장의 중책을 맡았다.1916년 겸백면의 박문용선생과 모의하여 복내면 회계원으로 근무하면서 일본이 강제로 부과한 세금 일화 이천원을 징수한것과 지방의 부호들로부터 모금한 돈을 합쳐 독립군 군자금으로 밀송하고 전라남북도를 왕래하면서 비밀조직의 확대, 일제 고관과 친일분자의 숙청, 일본 주요기관의 파괴, 독립군자금의 모금을 위해 활동하던 중 밀고한 자가 있어 1918년 4월 목포에서 일경에게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5년형을 선고받아 1919년 2월 공주감옥으로 이감되어 3년의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대한민국정부에서는 당시의 의열지사들의 행적을 일일이 조사 확인하여 훈포장을 추서하고 유족들을 위안해 주었는데 선생께는 1990년 8월 15일에 건국훈장애족장이 추서되었으으며 유해는 대전국립묘지 애국지사 제2묘역 309호 묘지에 이장되었다. 아아! 선생이 어찌 이를 기대하고 투쟁하였으리오마는 국가로서는 이것으로 최소한의 보상을 한 셈이요. 선생은 많은 후세인에게 귀감으로 우뚝서게 되었도다. 예향 보성인으로서 경향 각지에 살고 있는 뜻 있는 분들이 선생의 이러한 애국애족의 유적을 전하기 위해 추모사업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선생의 동상을 세우기로 합의하고 나에게 건립기문을 부탁하니 평소 선생과 같은 마을에 거주하면서 선생을 잘 알고 존경했던터라 감히 사양치 못하고 이렇게 쓰노니 선생의 동상이 구국의 표상으로 오래 오래 이 고장의 빛을 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