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page


229page

안규홍의진의 선후군장이 되어 보성·순천·고흥 등지에서 의병 활동을 하였다. 전남 보성 출신의 안규홍은 1907년 군대해산 후 거의를 목적으로 일심계를 조직하고 주인에게 군량과 자금을 받아내는 한편, 참봉 안극에게서도 무기와 자금을 제공받았다. 1908년 2월 관북 출신의 강성인과 합세하여 병력 70여 명으로 대오를 정비한 후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안규홍의진은 1908년 2월부터 1909년 9월 25일 체포될 때까지 보성·진산·순천·고흥·장흥·광양·함평 등지에서 대일 항전을 전개하였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1908년 2월 보성으로 들어오는 일본군에 대한 기습작전을 전개하여 전군을 궤멸시킨 파청대첩과 1908년 8월 24일 진산에서 일군 수비대 및 기병과 격전을 벌여 일본군 5명에게 중상을 입히고 크게 이긴 진산대첩, 그리고 1909년 5월 이후 함평의 심남일과 연합전선을 꾀하여 각처에서 유격전을 감행한 것이었다. 안규홍은 1909년 9월 25일 보성에서 광주경찰서 토벌대에게 체포되어 1911년 5월 5일 대구감옥에서 교수형에 처해져 순국하였다. 선규명은 1908년 봄 안규홍의진에 참가하여 선후군장이 되었다. 선규명은 보성 파청대첩, 동복 운월치전투, 진산대첩 등에 참전하여 크게 이겼고, 그 외 고흥·순천·대원사 등지에서도 승전을 거두었다. 1909년 9월 25일 안규홍이 체포된 뒤 의병진을 해산하고 귀향, 1939년 10월 12일 사망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