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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은연 중 민족운동을 펴고 급기야 뜻한 바 있어 기독교를 신봉하고 열열한 신도가 되어 집사 영수장로 등을 거쳐 그 해박한 한학지식과 문필 그리고 뛰어난 인품이 인정되어 순천노회에서 전도사로 임명하여 이곳 조성을 중심으로 덕산 예동 회천득 양천치 그리고 유둔등 7교회를 순회 시무케 되어 많은 교인들에게 영적 양식을 먹임은 물론 일제의 질곡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민족의식과 독립 정신을 일깨워 왔었는데 1940년 12월에 간악한 왜경에 검속되어 불경죄 치안유지법 위반 및 일본국체변혁 등을 선동했다는 죄목의 판결을 받고 1944년 5월까지 5개 성상에 걸쳐 광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으니 육순이 넘은 노령에 그 고초가 오죽하였으리오. 해는 바뀌어 1945년에 갈망하던 조국이 광복되자 독립촉성회 조성면 위원장으로 대한민국 독립 조기 달성에 안간힘을 쓰는 등 각방으로 활약하시다가 1973년 4월 12일에 94세를 일기로 별세하셨는바 오호라 석재라. 뉘라서 알았으리오. 그의 심오한 흉중에 불타는 애국정열을 그러나 때를 못 만나 진흙에 묻힌 옥이 되었다가 우리 정부의 혜안으로 발굴되어 1982년 광복절에 독립유공자로 현창되었나니 박 장로님께서 생전에 이런 국가적 우우를 받지 못하심이 무척 한스럽기는 하나 이제라도 그 영광이 길이 후손에게까지 미칠 것이요 또한 우리 교회에도 커다란 빛이 됨을 깊이 감사드리온 바 박 장로님께서는 지금 무봉의 천의에 면류관을 쓰시고 저 하늘나라 생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