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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광주 출신이다. 노일전쟁 이후 일제의 한반도 식민지화 정책이 노골화 되어가는 과정에서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에 대한 민족적 대응으로서 의병운동이 전국적인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이때 임창모는 능주 출신 양회일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1907년 능주를 공격하고 다시 광주를 치려다가 날이 저물어 화순·동복의 경계인 흑토치에 둔병하던 중 적에게 포위를 당하였다. 포위망을 탈출할 수 없게 되자 양회일이 선등대호하여, "의병 대장 양회일이 여기 있으니 맞서서 싸우자." 고 외치면서 나아가 싸우다가 적에게 잡혔다. 임창모 역시 힘껏 싸웠으나 역부족하여 결국 체포되었다. 그후 양회일은 광주 형무소에서 장흥으로 옮겨졌으나 단식 7일 만에 순국하였고 임창모는 지도로 유배되었다가 1908년 해배되어 귀가하였다. 이즈음 전라남도 보성 일대에서 안규홍(安圭洪, 桂洪, 進士, 담살이)의 의진이 가장 성세를 이루고 있었다. 임창모는 해배되자 마자 안규홍의 의진에 입대하여 선봉장으로 활동하였다. 당시 안규홍의 보성의진은 파청대첩·진산대첩·원봉산 전투 등에서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여 의병운동사상 기념비적인 승리를 구가하였다. 6월 이후 임창모는 독립부대를 편성하여 안규홍 의진과 분진하여 보성을 거점으로 활동하였으며, 전성기에는 부하가 2∼3백 명에 이르기도 하였다. 1909년 10월 12일 일본의 의병대토벌전이 전개되어 흑석산에서 일군과 접전하던 중 전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