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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조국의 비운에 수많은 의열사가 일어섰지만 종교문화교육을 통한 민족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쳐 빛을 오래 발한 분은 홍암 나철선생이 으뜸일 것이다. 선생은 1863년 계해 11월 2일에 여기 보성땅 벌교읍 금곡마을에서 부 신주 나용집공과 모 청주 한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보성고을은 예로부터 문과 의의 고장으로 이름 났거니와 선생은 일찍 문재를 날려 약관으로 서울에 진출 수년간 운양 김선생 윤식에게 사사하고 문과에 급제하였다. 30대에 사관등 문한요직을 거치면서 왕의 상전도 입었스나 을사년 전후에 국운이 날로 기울자 이송척등과 수삼차 도일 동양평화운동에 나섰다. 40대 중반에는 오공기호등과 자신회를 조직하여 오적주살을 꾀하다가 10년유형을 당하기도 하였다. 특사로 풀려나와서는 '국난망이나 도가존'을 믹ㄷ고 독립운동의 지속적 심화를 위하여 보다 근원적인 종교운동에 힘쓰게 되었다. 국조에 귀일하는 민족혼의 수도끝에 1909년(단기 4243) 사유대보름 단군교를 창도 포명하고 이어 대종교로 개명 제1세 교주가 되었다. 이후 경전을 편찬 간행하고 총본사를 백두산 너머로 옮겨 종교와 학교교육을 펴나가니 해외 독립운동의 선봉핵심 구실을 맡게 되어 독립군과 수뇌 김좌진장군, 서일 총재등은 물론 무오독립선언의 대표들이 거의 교인이고 제자들이었다. 또 국내외에 본사, 지사등을 마련하고 종교와 교육일반을 주재하면서 항일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16년 54세된 병진 한가위에 황해도 구월산에서 '천도해명 혈육??'를 탄한 유서와 2대교통을 전수하며 자진순절하였다. 배위 여산 송씨및 이씨정자와 5남1녀를 두었는데 모두가 독립운동 일선에서 활약 순사하였스며, 특히 정련, 정문 형제분은 종문의 10현으로 꼽히고 뒤에 3부자가 독립유공으로 서훈되었다. 아! 국조와 종교, 천하를 위하여 스스로 순명귀천한 예는 초유의 일이어니와 오래 묻힌 단군전통이 바로 대종사의 중광포명에 따라 길이 민족수호의 대본으로 자리잡게 되었스니 이제 홍익인간적 큰 발양은 민족과 인류의 기본과제가 아닐수 없다. 소생 동향의 인연으로 군당국및 기념사업회측의 청으로 금손 종근씨등의 도움을 받아 이 비문을 엮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