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page


104page

서 지니셨던 동국역대라는 책으로 우리 역사를 알리셨고 뒷산 바위위에 오르시어 초동들에게 체조를 지도하시기도 하고 바위틈을 흐르는 개울물에 멱을 감기도 하셨다. 광언의 부인을 따라 밭에가 콩을 뜯어다 죽을 쑤어 끼니를 때우시기도 하셨다. 달포여를 머문 선생께서 떠나면서야 내가 일본놈 한명을 죽이고 피해다닙니다 하며 광언의 어린 두아들을 서울 신식학교에 보낼것을 권하셨으나 승락을 얻지못했다. '이별난'이라는 시를 남기시고 언젠가 이시를 보며 제생각을 하실거라며 후일을 기약하고 살아있다면 꼭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하시고, 말년에 몸이 불편해진 광언은 어린 손자인 두회를 데리고 지내면서 그 두호라는 청년이 범상치않아 보였는데 아무 소식이 없구나하시면서 같이 지냈던 얘기를 자주해 주셨다. 광복을 맞아 환국하신 선생은 독립촉성회 보성지회를 통해 그 옛날 함께했던 분들이나 그 자손들이 기거하고 있는지를 물어오셨다. 동유하던 분들은 모두 타계하시고 그자손들이 있음을 전해들은 선생께서는 광언의 종손인 기옥에게 간절한 정이 담긴 사신을 보내오시어 지금껏 소중히 보관중이다. 광언의 차자인 재인으로 하여금 경교장을 찾게한 선생께서는 심심한 감사의 말씀과 함께 대형 존영을 온마을 가가호호에 친필서명하여 보내주시니 감개무량하였다. 선생의 전국일주시에는 전동민이 이곳 도로에 솔문을 세우고 환영인파가 인산인해를 이루었던바 옛날 그마루에 앉아 그후손들과 담소하시는 선생의 눈은 젖어 있었다. 그 옛날 근 두어달을 농사철에 폐를 끼쳤다하시며 그후에 소식을 전하지 못한 미안함, 큰 흉년이라 콩잎죽을 쑤어 먹었던일, 시원한 목욕, 더맛있었던 동천샘물등 추억을 쏟아 내셨다.재인등으로 경교장을 다시 찾게 하시고는 친필휘호를 내리셨고 옛날 떠날때 필묵을 선물한 선씨가족에게 후사하셨다. 선생의 국민장시에는 족제인 창회가 신을 도와 일가의 정을 깊게 하셨다. 1990년에야 마을앞에 은거비를 세웠다. 이제 이곳에 기념관을 세우고 그 사실을 돌에 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