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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문> 능성쌍봉(綾城雙峯: 현이양면쌍봉리)마을은 의사양공(義士梁公)이 살았던 마을인데 남쪽선비들이 차마 그 자취를 민멸(泯滅)할 수 없어 장차 비석을 세우려고 하여 나에게 비문(碑文)을 부탁하니 나도 천성이 있는지라 어찌 글이 서툴다하여 사양하리요 공(公)의 휘(諱)는 회일(會一)이요 자(字)는 해심(海心)이며 호(號)는 행사(杏史)니 본관(本貫)은 제주(濟州)이다. 사람됨이 효제(孝悌)하고 의기(義氣)가 강하여 대절(大節)이 있더니 갑오(甲午: 1894) 을미(乙未)년부터 국가에 변란(變亂)이 자주 일어나더니 드디어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이 체결되니 큰일이다. 공(公)이 분(憤)함을 참지 못하고 의병(義兵)을 일으키고자 하였으나 부모(父母)가 계심으로 쉽사리 행동에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그 뜻을 알고 말하되 오직 오른일은 하여야 하니 늙은 아비는 염려를 하지 말라하였다. 공(公)이 눈물을 흘리면서 명(命)을 받아 드디어 고을 장정(壯丁)들을 모아 대오(隊伍)를 편성하고 가산(家産)을 털어 병기(兵器)를 마련하여 소를 잡고 술을 준비하여 군사(軍士)들을 배부르게 먹여 정미(丁未: 1907) 3월 경자(庚子)일에 출진(出陣)하니 그때 이미 남쪽 여러 고을이 왜놈들의 소굴이 되어 세력(勢力)이 만만치 않았다. 이에 곧바로 능주(綾州)에 다다르니 적도(賊徒)들이 다 달아났기에 화순으로 진격하니 적들이 먼저 도망쳐버렸다. 장차 광주(光州)로 들어가려하였다. 이미 어둡고 길이 험하여 잠복병(潛伏兵)이 있을까 염려하여 화순(和順) 동복(同福) 경계(境界)에서 머무르고 이튿날 일찍이 잠자리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출발하려하니 많은 적도들이 몰려오므로 공(公)이 여러 병사(兵士)를 거느리고 총력을 다하여 싸우고 가까이 다다르니 적도들이 철통(鐵桶)같이 애워싸고 달라드니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하는 수 없이 아군(我軍)이 패전(敗戰)하니 공(公)이 큰소리로「나를 죽이고 모든 사람은 상하지말라 내가 맹주(盟主)이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체포되어 광주(光州)에 오니 적도들이 힐책(詰責)하여 가로되 무슨 까닭으로 난(亂)을 일으켰느냐」고 하였다. 공(公)이 정색(正色)하여 가로되 일본(日本)은 우리나라가 영원토록 반듯이 갚아야할 원수이다. 우리 중전(中殿)을 살해(殺害)하고 주상(主上)을 협박하며 이제 또 병(兵)을 동원하여 대궐에 들어와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을 강제로 체결하니 우리 3천리강토를 약탈하여 우리들을 노복(奴僕)으로 만들려하고 저 五적들이 미치광이처럼 날뛰어 임금과 나라를 팔아 거리낌이 없으니 그러므로 나는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성토(聲討)하고 오적(五賊)들을 죽이고자하여 의병(義兵)을 일으켰다. 어찌 감히 난(亂)이라고 하느냐고하니 적이 또 부르되 동모(同謀)하는 사람이 누구냐고하니 공(公)이 가로되 충(忠)과 의(義)를 위하여 자연히 함께 하는 것이며 또 내가 여기에 있으니 다시는 다른 사람을 묻지 말라고 하였다. 4월에 적들이 물으되 부모가 계시는데 봉양치 않으니 이것이 효(孝)라고 할 수 있느냐 효를 하지 못한 사람이 어찌 충(忠)을 할 수 있느냐 초야(草野)에서 책임이 없는데도 이 처럼 망동(妄動)하다가 마침내 살아 잡히니 이것이 지(智)라고 하겠느냐 이것이 의(義)라고 하겠느냐고 하니 공(公)이 가로되 충(忠)과 효(孝)는 본래 둘이 아니니 충성을 다 하면 효도를 다 하는 것이다. 또 나라에 도(道)가 있을 때에는 공직자(公職者)들이 자기 소임을 다 하므로 서민(庶民)들은 진실로 책임이 없는데 조정(朝廷)에 간사한 무리들이 가득하여 의리일맥(義理一脈)이 오직 초야(草野)에 있으니 초야의 서민이라하여 편안하게 가만히 있으면 이는 온 세상이 금수(禽獸)가 될것이니 그 참을 수 있겠는가. 이제 내가 잡힌것은 힘이 모자라서 잡힌것이지 의리(義理)로 굴(屈)한 것이 아니다고 하였다. 6월에 나주의 지도(智島)에 갇히고 12월에 석방(釋放)되었다가 명년 五월에 강진(康津)으로부터 압송할 때에 일기문자(日記文字)까지 수색하고 얼마 안되어 돌려보내더니 또 장흥(長興)으로부터 잡아갈적에 적들이 말하기를 어찌 부모형제와 이별을 하지 아니하리요하니 공(公)이 가로되 나 이미 이별하였다하고 옷을 떨치고 일어나니 기색이 자못 양양하였다. 이로부터 혹독한 형벌을 가하여 반듯이 굴복을 받으려하였으나 공(公)이 흥분하여 꾸짖음이 더욱 강경하여 조금도 좌절함이 없이 7일동안 먹지 아니하고 옥중에서 병(病)이 나서 죽으니 무신(戊申:1908) 6월 24일이니 향년 53세이다. 먼저 광주에 있을 때에 그 아우 회락(會洛)이 문밖에서 밤낮으로 울고 있으니「공(公)이 서면(書面)으로써 지사(志士)가 대의(大義)를 위해 죽으니 무슨 두려움이 있겠는가. 그대는 모름지기 돌아가 부모봉양 잘하여 형(兄)을 위로하게나 형(兄)은 빨리 죽음으로써 영화롭게 여기겠네」하고 끝 아우 회룡(會龍)이 종군(從軍)하다가 총탄(銃彈)에 맞았으나 죽지 아니하니 잡아 국문하니 말하기를 형(兄)은 나라 위하여 죽고 아우는 형을 위하여 죽겠다고 하였다. 아! 가풍(家風)이 어찌나 그 처럼 열열(烈烈)하는고 위로는 의리(義理)를 깨우쳐 준 부모가 있고 아래로는 의리에 따른 아우가 있으니 아! 가풍이 어찌나 그 처럼 굳세는고. 몇백의 훈련도 되지 않은 의병으로 수많은 적도들을 대항하니 승산이 없음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인데도 공(公)의 마음에는 오직 의리(義理)뿐이니 성공하고 실패함을 어찌 족히 논하리요. 마음이 북두(北斗)를 관통하고 기운이 산하(山河)보다 장하니 진실로 가히 써 길이 후세에까지 전하리로다. 그러므로 비록 패전하였으나 오히려 이겼으며 비록 죽었으나 오히려 살았도다. 공의 현조(顯祖) 혜강공(惠康公) 학포선생(學圃先生)이 조정암(趙靜庵) 김충암(金沖菴) 제현(諸賢)과 함께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화(禍)를 당하고 혜강공의 손자 예빈봉사(禮賓奉事) 산욱(山旭)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의병을 일으켰으며 봉사의 손자 지남(砥南)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안은봉(安隱峯)을 따라 의병을 일으켰고 이제 공의 의열(義烈)이 또 이와 같으니 이 그 대대로 연속됨이 아니드냐. 명(銘)하노니 어리석고 포악한 백만의 적도를 감히 일사(一士)가 당하니 오직 의리(義理)로써 함이로세. 저네들은 그 간사함이요 나는 정당함으로써 하니 비록 백번 끊어도 굴하지 아니함은 하늘의 명(命)한 바로써 그 형벌(刑罰)이 혹독하고 그 말이 칼날같으니 그 일은 실패하였으나 그 기운은 산악(山嶽)과 같네. 빛나는 충절(忠節) 빛돌에 새기니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려도 천고(千古)토록 변치 않으리라. 동강(東江) 김 영 한(金寗漢)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