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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 내가 맹주니라 다른 사람은 죽이지 말라고 소리쳤다. 전투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선생은 다른 여섯 의사와 함께 체포되었다.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 김대현이 옥중에서 순절하였다. 선생은 한없이 분노하며 사자후를 토했다. 이번 기병은 이등박문과 오적을 베려는 것이다. 만국공관에서 이등과 함께 공판을 받아야 마땅하지 않는가 비록 절의만으로 일어났지만 장차 지용있는 의사들이 많이 나와 치욕을 갚을 것이다 하였다. 선생은 15년의 유배형을 언도받고 지도로 유배되었다. 이해 12월 순종의 특사가 있었다. 이후 호남각처에서 의병이 일어나니 재기를 도모하였다. 1908년 5월 강진 헌병대에서 선생을 구금하였다. 이때 힘으로 헤어리지 않고 오직 의만을 알 뿐이니 두 번 포로가 되어 수모를 겪는구나. 나라 사랑 붉은 마음이 세상에 드러내지 못하고 저 세상에서나마 면암과 함께 노닐어 볼까나 라는 시를 읊었다. 이미 죽음을 각오하였다. 6월에 장흥 헌병대가 선생을 다시 체포하였다. 지독한 고문이 계속되었다. 선생은 밥 한톨가지 거부하며 항거하였다. 그러기를 7일 마침내 1908년 6월 24일 내 비록 가지만 너희가 천하의 의사를 다 죽일 수는 없을 것이다 하며 세상을 떠났다. 동의제공도 선생과 운명을 같이 하였으니 앞서는 양열묵이 고광순과 함께 피아골에서 순절하였고 후로는 임창모 안찬재 임상영 차재문 이백래 등이 순국하였다. 선생의 원배는 여흥민정의 딸로 일찍 세상을 떳으며 재배는 파평 윤병규의 딸로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 원승은 동국 동해 동진 세 아들과 딸 하나를 두고서 원수를 갚지 못하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여러 지방으로 떠돌다가 세상을 등졌으며 딸은 진원 박태선에게 출가하여 박하주를 두었다. 일찍이 회누 안규용 단운 민병승 동강 김영한 석농 오운영 송산 권재 김율 계정기와 같은 고사숙덕이 행장과 전과 찬을 짓고 또한 순의비문과 묘지명을 적어 선생을 적어 선생을 기렸건만 후생이 읽을 수 없기에 이양 유림회에서 평이한 글로 다시 지어 마을 앞에 비를 세우고자 하여 연소박학을 주체하지 못하고 감히 나서게 되었다. 아아선생은 일찍이 장수의 승패를 논하면서 도를 알지 못하면 이긴다 해도 지는 것이요 도를 잃지 않았으면 져도 이긴것이라 하였고 또한 살면서 살고 있음을 모르고 죽으면서 죽은 줄을 모르면 이것이 허생허사가 아닌가 하였다. 선생은 승패보다는 도리를 찾았고 뜻있게 살고자 하였으며 또한 죽을 때에 죽고자 하였다. 그래서 사지로 가면서 당당한 의병은 정명이 우선이니 평민에 해를 끼치니 마라 하였다. 또한 평소 이웃과 술빚고 음식을 나누며 작회설계하여 돈목을 진작하고 강상을 고취하며 모든 사람을 인정과 선심으로 대하였다. 선생이 10세에 푸른 솔 높고 곧은 마디 가을인들 어찌하랴 밝은 달 맑은 혼은 밤에도 훤하네라는 시를 지었는데 한 평생이 실로 푸르고 높고 곧으며 밝고 맑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계당산을 바라보며 당당한 충의의 백성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