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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장 행사 양선생 회일 순의 기념비 선생은 1856년 9월 27일(음) 능주 오류촌에서 만우양재욱과 창녕 조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제주로 기묘 명현 혜강공 양팽손의 후예이다. 어려서 청상고매한 지기를 드러냈으며 효제우애와 신의무애가 지극하였다. 8세에 모친이 세상을 뜨자 애통해함이 마치 어른과 같았고 이후 계모 함양박씨를 섬김에 조금도 얼굴빛을 달리하지 않았다. 선생은 일찍부터 문사가 뛰어나 인근의 으뜸이라 부친의 뜻에 따라 과거를 준비하였다. 1883년 쌍봉으로 이사한 후에 근 10여년을 서울에서 보냈다. 사방경영의 포부를 키웠지만 권세가를 찾지 않았다. 오직 도의로서 이건창과 같은 당대의 석학과 문유할 따름이었다. 1894년 갑오경장이 일어나자 출사의 뜻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왔다. 1896년 중조산 효종동으로 숨어들어 농사지으며 부모를 봉양하고 생도를 가르쳤다. 대여섯해가 지나자 종친들은 누세종손이 이렇게 홀로 산중에 지낼수 없다하여 1901년에 쌍봉 옛집으로 돌아왔다. 1904년부터 도적이 산야를 횡행하자 도약장이 되어 청장년을 훈련시키고 경계를 펴서 고을을 편안케 하였다.선생은 을미 이래 나라가 곤경에 처하였는데 마침내 지난 11월 늑약으로 선왕의 강토는 남아난 곳이 없고 모든 백성이 원수의 포로가 되었다 한탄하였다. 1906년말 면암 최익현 선생이 대마도에서 운명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분연히 적개순국을 결심하였다. 다만 노부모 때문에 망설임이 있었다. 이에 만우공은 동생과 아들이 있으니 오직 의로움으로 왕사에 진력할 뿐 늙은 나 때문에 걱정하지말라 하셨다. 실제 양회락과 양회용도 동의하였다. 이때에 녹천 고광순과 성재 기삼연이 장성과 창평 등지에서 창의를 준비하였는데 선생은 능주에서 기병하여 연합하고자 하였다. 1907년 1월부터 양열묵 임상영 이병화 등과 함께 거사를 서둘렀다. 가산을 처분하여 3천금의 군자금을 마련하고 방도때에 사용하던 군기를 다시 수집하는 한편 호협후걸의 의사를 연남하고 담략경예한 장사와 교결하였다. 보성 임창모와 이백래 화개 이광언 남원 노현재 정읍 유병순 등이 가세하였으며 인근의 최기표 신재의 안찬재 정세현 김대현 차재문 등이 합류하였다. 근거지는 계당산 산중에 두고 쌍산의소라 하였다. 선생은 맹주가 되어 1907년 3월 10일 출전하여 능주와 화순을 점령하였다. 목표는 호남의 웅부 광주였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