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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술년(서기 1910년) 국치를 우리민족 근대사에 가장 치욕적인일로 기억조차 하기 싫다. 나는 규사 송공 ???일다가 당시의 억울한 일을 생각해보니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 잃어버린 강토를 회복할 길은 영영 사라지는가? 도이의 침략에 대항하여 의병을 일으켜 끝까지 굴하지 않고 항전하다 전사한 열사가 있는가하면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투쟁을 전재한 선열도 있고 분통한 마음을 간직한채 충절을 지켜 순국한 분이 17명이나 되는데 규사 송공주면이 그 중의 한분읻가. 공은 대대로 많은 선비를 배출한 소평송씨문중에 태어나 순박영오한 자질로 유년시절에 중국역사의 고대기록인 통감을 즐겨 읽었는데 그중에도 의사인 예양과 왕촉의 말을 크게 써놓고 날마다 세번씩 읽었다. 성동이 되어서는 대학자인 기노사와 최면암 두 스승을 사사하여 서신과 대면으로 학문에 정진하였는데 노사선생께서 작고하시니 공은 문하에 늦게 든것을 통한하고 면암선생에게 성의를 다하였으니 면암선생께서 대마도에 유배되자 친히 바다를 건너 선생을 배알하고 격려하였다. 이때 공의 나이 21세때의 일이다. 평일에 독서를 즐겨했는데 좋은 글귀를 가려내 다섯가지 자경문을 지어 이의 실천에 유의하였고 가난한 이웃을 돕는데 몸소 실천하였으며 자신만 배부르게 먹고 사는건 더러운 일이다고 하였다. 갑오응제시에 합격했으나 은전을 받지 않았고 무술년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