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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시설 관리번호: 50-1-20 / 지강 양한묵 선생 ● 신망 두터운 향반의 자제로 태어나다 지강 양한묵 선생은 1862년 음력 4월 29일 전남 해남군 옥천면 영신리에서 양상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2대조 학포 양팽손은 "기묘명현"이고, 6대조 양처중은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조부 양제하는 영암의 양사재를 분관하여 교육사업에 진력하는 한편 수리사업을 적극 전개하였다. 1886년 전국에 걸쳐 콜레라가 만연하자 그는 여러 비법을 사용하여 다수의 인명을 구출하여 인근 농민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 동학사상을 만나 애국 계몽운동에 앞장서다 18세에 불교, 선교, 천주교, 신교, 음양복술 등 다양한 분야의 서적을 섭렵한 선생은 1894년 탁지부 주사에 임명되어 선대의 고향인 능주에 세무관으로 부임하였으며, 1894년 동학농민운동의 격랑 속에서 체포된 장흥, 보성 등의 동학농민군을 다수 구출 하면서 동학사상을 만나게 되었다. 1897년(35세) 관직을 그만두고 일본으로 건너가 개화운동을 추진하던 중 동학 교주 손병희 선생을 만나 동학에 입교하였다. 1904년 8월 일본군의 지원을 받은 송병준의 주도로 결성된 친일단체인"일진회"에 대항하기 위하여 1904년 이준 등 독립협회인사들과 "공진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05년 5월 윤효정, 이준 등과 "헌정연구회"를 조직하였으며, 〈헌정요의〉를 저술하여 황성신문에 연재하였다. 1907년 이기, 나인영, 고정주 등과 "호남학회"를 조직하고, 평의원으로 임시회장을 맡아 교육방침에 대한 연설을 하였다. 이는 신문물수용에서 한발 뒤진 호남출신의 자제들에게 근대교육을 시켜 격동과 변혁의 사회를 이끌어갈 인재로 양성하기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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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의 열망을 품고 옥중에서 지다 손병희를 도와 동학의 근대화에 기여한 선생은 천도교 교리강습소를 통해 근대지식과 민족의식을 심어주었다.1909년 이완용 저격 미수사건의 배후로 지목받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고,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식에 참여하여 독립만세를 외치고 일본순사에 체포되었다.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는 중에도 당당한 태도와 독립의 열망을 잃지 않았으나, 1919년 5월 26일 56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민족대표 33인 중 유일한 옥중 순국이었고 정부에서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3.1운동 100주년 기념 2019년 9월 화순군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