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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의진 참모들은 피체되어 양회일과 임창모는 유15년, 안찬재, 이윤선, 신태환(申泰煥), 유태경(柳泰京)은 유10년에 처해져 전남 지도(智島)로 유배되었다가 그해 12월 3일 융희황제 즉위 기념 사면조치에 의해 풀려나게 되었다. 1908년 3월 전남 남서부 지역에서 활약하던 김율(金律)의병장이 피체되고 김율의진의 참모였던 심남일(沈南一)이 이전을 이끌게 되자 안찬재는 그 의진의 중군장이 되었고 안찬재와 동문수학했던 공도 함께 그 의진에 참여하게 되었다. 공은 심남일 의진에서 4월 7일 (음력 3월 7일) 강진 오치동전투, 5월 14일(음력 4월 15일) 장흥 유치면의 곽암전투를 벌이는 등 수차례 전공을 세웠으나 장흥에서 일본 군경과 밀정을 처단하는 의병투쟁에 나섰다가 6월 16일(음력 5월 18일) 유치전투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정부는 공이 순국한지 110년이 지난 2018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으니 만시지탄이라 아니할 수 없다. 공은 1888년 12월 14일 출생하여 1908년 5월 18일(양력 6월 16일)에 순국하였으니 실제 향년은 21세이고 국가보훈처 공훈록에는 순국일을 제적등본에 나온 5월 16일로 기록하였다. 오호라 학문을 닦던 약관의 유생으로서 국권회복을 위해 목숨을 바쳤으니 그 공적은 두 말할 나위도 없고 공이 순국할 당시 부인 남평문씨는 시어머니와 2명의 시동생 네살 아들, 만삭의 유복자와 함께 모진 세월을 보내야만 했으니 그 고초를 어찌 이루 다 말하리오! 생활을 하면서 모진 세월을 보내야 했고, 손자 영현은 조부의 행적을 찾기위해 30여년동안 노력한 끝에 마침내 조부의 공적을 국가로부터 인정받게 되었으니 참으로 효손이라 할것이다. 나라와 겨례를 위해 목숨을 바친 공의 숭고한 뜻은 길이 빛날 것이며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이란 말과 함께 왕대밭에 왕대가 계속 나올 것이 분명하다. 경자년(2020) 정월 인천대학교 독립운동사 연구소장 이태룡 삼가 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