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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石 金鏞相先生 忠魂碑文(해석 김용상선생 충혼비문) 海石(해석) 金鏞相(김용상)선생의 자는 益重(익중)이다 진주후인으로 敬順王(경순왕)의 8王子(왕자)이자 三韓贊文功臣(삼한찬문공신) 金紫光祿大夫(금자광록대부) 門下侍中(문하시중) 三知府使(삼지부사)를 지내고 晋城君(진성군)에 봉해진 諱(휘) 錘(추)의 후예이다. 輔國崇祿大夫(보국숭록대부) 傾書雲觀事(경서운관사) 判門下府事(판문하부사) 都評議使司事(도평의사사사) 集賢殿(집현전) 太學士(태학사)로 晋陽府院君(진양부원군)에 봉해진 中始祖(중시조) 諱(휘) 茂珍(무진)의 후손이며 諱(휘) 履用(이용)은 門下判三司(문하판삼사)로 보은 정몽주 선생, 목은 이색 선생 등의 제현과 함께 상소를 하였다가 시류에 거슬려 무안으로 유배되었다. 선생의 曾祖(증조)의 諱(휘)는 應(응)?이며 호는 愚拙齊(우졸제)인데 학행과 천성이 출중하였고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조고의 諱(휘)는 伸鐸(신탁)이고 호는 조락재인데 문장과 올바른 처신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고, 考(고)의 諱(휘)는 한봉인데 기자가 준굉하고 향약규범을 강수했으며, ?는 밀양 박씨 효서의 딸이다. 선생은 철종9년(1858년) 무오3월20일에 도장리에서 출생하였는데 재질이 탁월하고 두루 경전을 익혀 詩書(시서)와 百家書(백가서)를 통달하였다. 선생의 詩律賦詞(시율부사)가 세상에 알려져 경향각지의 선지들의 추앙을 받았다. 고종21년인 갑신년 이래로 국운이 風前燈火(풍전등화)처럼 위태로워지자 田園(전원)에 隱居(은거)할 생각을 버리고 후생을 가르치는데 뜻을 품은 선비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1905년 乙巳勒約(을사늑약)이 체결되고 1910년 庚戌(경술) 抗日合邦(한일합방)이 되어 나라가 망하게 되자 痛憤(통분)을 이기지 못하여 전국에 뜻을 같이 한 인사들을 규합하여 1914년 京鄕義士團(경향의사단)을 조직하여 일제 침략에 항거하였다. 선생은 자신의 전재산을 國權回復獻金(국헌회복헌금)으로 내놓은 한편, 애국지사 이락정과 함께 경성부 김태영, 전남영암 유병하, 광주임곡 성기섭, 함평 오덕영 외 3명에게서 금 207圓(원)을 모금하여 광복군 군자금과 의병활동을 돕고 있던중 군자금 제공자의 밀고로 審院(심원)에서 復國運動(복국운동)의 정당성을 불굴의 의지로 지키며 抗言(항언)하고 광주형무소에 이감 복역중 고문의 여독으로 별세하였다. 2003년8월15일 제142750호 독립의사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선생의 위업은 비록 뒤늦게 알려졌지만 세상에 이름을 떨친 업적을 자손만대에 길이 남기고자 이 비를 세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