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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亭 金榮夏先生 忠魂碑文(송정 김영하선생 충혼비문) 愛國志士(애국지사) 金榮夏(김영하)선생의 자는 重先(중선), 호는 松亭(송정)으로 고종9년 1872년 전남 화순군 도암면 도장리에서 출생하였으며, 선생은 본디 천품이 강직하고 氣骨(기골)이 장대하였으며, 일찍이 후일 의병장이었던 海石(해석) 金鏞相(김용상) 族戚(족척)의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심신을 연마하고 애국애족정신을 배워 익혔다. 1905년 乙巳勒約(을사늑약)이 체결되고 1910년 抗日合邦(한일합방)이 되어 나라가 망하게 되자 선생은 통분을 이기지 못하여 의병에 가담하였고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였다. 그러나 衆寡不敵(중과부적)으로 의병이 分散之境(분산지경)에 이르자 뜻을 같이한 정동근, 고성후, 양재홍, 김교낙, 문재교 등과 함께 재경광복단과의 연락하에 지하비밀 독립운동단체인 光復團(광복단)을 조직하였고, 전라남도 광복단 제일지단의 일원이 되어 國權回復(국권회복)을 위해 투쟁하였다. 선생께서는 또한 자신의 전 재산을 광복 독립운동 헌금으로 내놓은 한편, 나주의 정경원, 윤덕열. 함평의 정치국 등 도내 부호에게도 광복군 군자금을 출원케하여 광복군과 의병을 돕고 해외 망명동지를 도우며 獄中同志(옥중동지) 구출에 주력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러던중 함평에서 군자금 제공자의 밀고로 왜관으로부터 체포령이 내렸다. 선생께서는 향리로 내려와 은신해 있다가 1918년 5월에 능주 헌병대에 체포되고 그후 함평으로 압송되었으며, 목포 검사국을 거쳐 광주형무소에 복역중 제일심에서 징역10년을 선고 받았다. 그러나 이에 대한 불복항소로 1919년3월5일 대구 복심원에서 원심대로 징역10년을 선고받고 복역중 고문으로 인한 여독으로 발병, 1921년1월11일에 옥사하였다. 1980년8월14일 제1238호 독립의사 건국포장이 추서되었고 다시 1990년12월26일 제213호 建國勳章(건국훈장) 愛國章(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선생이 순국한지 86년 광복이 되어 독립된 나라에서 행복하게 사는 우리 후손들은 늦게나마 그 업적을 길이 남기기 위해 이 비를 세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