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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學農民革命 國家有功者 韓達文 先生 記念碑(동학농민혁명 국가유공자 한달문 선생 기념비) *. 한 달문(휘: 영우, 자: 치화, 호: 묵헌) 선생 약력 - 1859년 6월 2일 도장면 동두산 생 - 1886년 절충장군 행용양위 부호군 - 1894년 동학농민혁명군 대장 - 1895년 4월 1일 졸 - 1998년 5월 동학농민혁명 국가 유공자 동학 농민 혁명군 대장 한달문은 1859년(철종 기미년) 6월 2일 도장면 동두산(현 도암면 원천리 동산)에서 태어났다. 유년 시절부터 영민한 선생은 기개 또한 웅장하여 상대를 압도하는 남다른 면모를 보였으며 열심히 공부하고 무에를 연마하여 27세 되던 해인 1886년 절충장군 행용양위 부호군의 무관으로서 최고위급 관직에 해당하는 벼슬을 하였다. 벼슬을 하던 차 당시 안으로는 무능하고 부패한 조정 관료들의 권력다툼으로 날이 새고 탐욕스런 벼슬아치들은 백성들의 피땀을 쥐어짜는데 여념이 없었으며 밖으로는 미국, 러시아, 프랑스, 영국 등 강대국들과 일본은 우리나라를 차지하기위해 호시탐탐 침략의 마수를 뻗쳐오는 절박한 상황에서 선생은 사회개혁과 새로운 세상 건설을 추구하며 보국안민의 깃발을 들고 탐관오리처단과 반봉건 반외세투쟁으로 나가고 있던 동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에 선생은 뜻을 같이하는 장정들과 함께 1894년 9월 14일 전라북도 삼례 봉기에 참여하여 동학농민 혁명군 대장이 되었으며 그후 주로 나주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1894년 12월 나주 동창 유기 모시굴 점등(현 전남 영암군 신북면 월평리)에서 농민군과 민보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결국 선생을 비롯한 27명이 사로잡혀 강도수, 정사심, 이화삼 등 14명은 총살되었고 한달문, 주심언 등 13명은 나주에 주둔한 관군 진영에 압송되어 모진 문초를 받았다. 당시 관에서 절충장군이라는 높은 벼슬까지 했던 선생이 농민군에 가담한 죄는 결코 가벼울 수 없었고 그로인해 선생이 겪은 갖은 악형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때 나주옥에서 관군 진영에 잘 아는 이가 있어 목숨을 구할 방도가 있으니 돈 300냥과 의복을 지어 보내달라는 편지를 선생의 모친(도장면 동주산 쌍동댁)에게 보낸 것으로 보아 나주옥에서 겪은 갖은 고초와 처절하고 절박한 심정, 당시의 부패한 사회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이후 선생은 나주옥에서 겪은 갖은 고초 등으로 장독에 의해 1895년 4월 1일 3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 후 동두산에서 살던 후손들은 뿔뿔이 흩어져 지내고 있던 차 1994년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에 갑오년 납월(1894년 12월)에 선생께서 어머니께 보낸 편지를 공개하면서 선생의 발자취를 더듬어 널리 알리게 되었다. 1998년 5월 동학농민혁명 국가 유공자로 지정되어 이를 기념하여 후세에 널리 알리고자 이 비를 세운다. 2011년 4월 17일 한승구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