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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공은 기개 또한 웅장하여 상대를 압도하는 남다른 면모를 보이셨다.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고 이를 위해 헌신하리라 다짐하고 무에를 연마하는 한편 서책 또한 가까이 하셨다. 각별한 부모 봉양은 근동의 칭찬을 한몸에 받았으며 나가서는 남들의 본이 되셨고 들어와서는 인륜의 도리에 충실하셨다. 고종 23년 병무 광서12년(서기 1886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절충대장 행용양위 부호군에 임명되어 국가의 크고 작은 재난에 솔선수범으로 대처하고 백성을 구휼하는 등 선행도 많았다. 그러나 평소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곧은 성품의 소유자로 당시 무능하고 부패한 조정의 권력 다툼에 회의(懷疑)를 느껴 백성이 주인이 되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자 동학농민혁명군대장으로 활동하던차 고종 31년 갑오 12월 나주 동창 유기 모시굴 점등(현 영암군 신북면 월평리) 전투에서 민보군에 잡혀 나주옥에 압송되어 장독(杖毒)으로 고종 32년 을미 4월 1일(서기 1895년) 세상을 떠날때까지 공이 보여준 대소범절의 실천과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곧은 정신은 후대에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셨다. 정부인 영양천씨와의 사이에 재기와 재인 형제를 두셨으며, 손자로는 관용, 성용, 봉용을 두셨고 이후로는 승철, 그리고 공의 현손인 상탁(시조 난공의 35대손)에 이르고 있으며, 후손 모두가 입신하고 번성한 가계를 이루고 있어 이는 우연한 일이 아니며 가문에 내린 특출한 두뇌와 곧은 정신을 이어받아 정성어린 양육의 결과라 여겨진다. 찬란한 덕행을 간략히 서술하여 자손 만대에 영전(永傳)코저 근(謹) 재배(再拜) 입비(立碑) 하나이다. 서기 2011년 4월 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