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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회는 전라남도 화순(和順) 출신이다. 1907년 대한제국군이 해산되고 노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한반도에서의 국제적 우위를 점하게 되자 식민지화 정책을 적극 추진하면서 이에 대한 국내적 대응으로서 의병운동은 보다 적극적인 양상으로 전환되었으며 그 저변이 확대되어 나갔다. 특히 호남 일대에서는 보성(寶城) 출신의 서민의병장 안규홍(安圭洪)을 중심으로 의진이 형성되어 일반 서민들의 의병 운동이 적극 추진되고 있었다. 이관회는 안규홍 의진에 참가하여 선봉장(先鋒將)에 임명되었다. 이관회는 1908년 2월부터 1909년 7월 의진이 해산될 때까지 2년 동안 의진의 지도적 인사로서 크고 작은 전투에 참여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당시 이관회와 함께 의진의 지도부를 이루어 함께 전투에 참여한 동지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의 병 장 안규홍(安圭洪) 유격장 안택환(安宅煥), 부장 염재보(廉在輔) 소휘천(蘇輝千), 선 봉 이관회(李貫會) 좌우부참모 오주일(吳周一), 좌우익장 정기찬(鄭基贊) 나창운(羅昌運), 송경회(宋敬會) 서기 임정현(任淨鉉), 군수장 박제현(朴濟鉉) 이관회는 이상의 지도층 인사들과 더불어 크고 작은 의병전쟁을 수행하였다. 1908년 2월 일본군은 보성군 조성(鳥城)에서 벌교·순천을 연결하는 의병토벌군을 구상하고 있었다. 보성 의진은 그 작전을 미리 포착하여 적의 출동노선을 탐지하여 파청(巴靑) 일대에 복병하고 기다렸다. 그때 적군 중 최강을 자랑하던 수호(水戶)·평정(平井)의 2부대가 파청으로 들어섰다. 의진은 그들에게 일제 사격을 가하여 두 부대장을 비롯하여 전군을 궤멸시키고 그들로부터 무기와 서류 일체를 전리품으로 노획한 후 대원산(大院山)으로 들어가 호군( 軍) 하였다. 그 결과 일군들은 보성 의진을 최강부대로 지목하게 되었으며, 일군들은 전력을 집결하여 파청전투의 보복전을 감행하였다. 그 결과 진산(眞山)전투, 그리고 운월치(雲月峙) 전투를 전개하였지만 모두 의병들의 대 승리로 끝났다. 1908년 8월 의진은 보다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여 진산(眞山) 전투를 전개하였고, 8월 24일 원봉 기병 주둔소를 야습하여 50여 명의 적을 사살하고 창고를 접수하여 많은 물자와 화약을 노획할 수 있었다. 그 이후 전세가 다소 불리하여 보성에서 고흥(高興) 등지로 거점을 옮겨 의병운동의 확산을 꾀하였다. 그러나 적은 고향에 남은 가족을 이용하여 회유, 귀순을 종용하여 많은 의병이 흩어졌다. 1909년 7월 이후 의병운동 전개의 한계성을 느끼고 지도부는 의병 해산을 단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후 지도부 인사들은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과 마지막 고별을 하고 조국을 위하여 목숨을 산화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를 탐지한 일군에 의해 안규홍은 9월 25일 부석(富石) 대위와 광주서 순사들에게 체포되어 결국 처형되고 말았다. 이관회는 적의 눈을 피하여 은신하고 있었으나 1910년 8월에 적에게 그간의 행적이 드러나 화순(和順)에서 체포되어 역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