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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더욱 삼엄해지자 공은 동년 12월 말일에 서둘러 결사의 동지 정건수 이순석 등 7명과 함께 작전지도와 무기를 탈취하고 광복군의 주재지를 향해 탈출하였다. 그러나 생소한 지형에다 즉시 추격해 온 일군에 의해 모두가 사살 또는 체포되는 위기에 처했었는데 이때 마침 중국 제74야전사령부 다온사 부대가 일군을 격퇴하고 공 등을 구출하여 도중에 전사한 이순석을 제외한 7명 모두가 구사일생으로 사지에서 탈출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공 등은 신분을 확인할 수 없다는 이유로 포로로 취급되어 감금되어 있던 중 철책 밖으로 던진 서찰의 내용이 광복군에 전달되어 이듬해 1월 10일 중경의 광복군총사령부 경위대에 인도되었다. 그리고 동년 1월 25일부터 토교에서 정치 경제 군사 사상 교육을 이수하고 동부대에 배속되어 임정요원들의 경위를 담당하면서 일군과의 교전에도 수차 참여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종전 후에도 공 등은 한국외교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주화대표단으로 계속 체류하면서 한국어학회를 설립하여 귀국을 준비 중인 교포자녀들에게 한글과 고국의 풍속예절 등을 교육하고 이청천 장군을 호위하다가 이듬해 1946년 6월 8일에 이범석 장군의 인솔하에 임정의 가족들과 함께 귀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김구 선생으로부터 조선 경찰사관학교 1기생을 모집하니 상경하라는 통지를 받았으나 공은 노모의 봉양을 위해 불응하고 교단에서 활동하다가 중도에 사퇴하고 농업에 종사하다가 1990년 1월 17일에 향년 66세로 졸하였다. 사후에 공의 광복군 활동 사실이 인정되어 1990년 8월 15일에 정부로부터 독립훈장 애족장을 받고 대전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이장하였다. 김해김씨 석자를 취하여 3남 1녀를 육하니 동인은 경주 김순정을 취하여 호현 지혜를 출생하였고 동호는 인천 이미영을 취하여 훈화 지원을 생하고 동태는 전주 이정선을 취하여 기원 부영 세현을 생하고 일옥은 남원 윤택호에게 가하여 효정 수정 승환을 생하였다. 오호라. 공이 청명한 자질로 정훈을 복응하여 명문교에 진학하였으니 태평한 시대를 만났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