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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 모암(慕唵) 장희수(張凞洙) 항일 기적비 - 관리번호 : 50-1-49 / 관리자 : 흥성장씨 효산 문중 대표 장동연 이 곳은 애국지사 모암(慕唵) 장희수(張凞洙)님의 생가이며, 비는 애국지사님의 공적을 기리는 항일 기적비입니다. 애국지사 장희수님은1924년 갑자(甲子) 6월 12일 태어나 생후 57일만에 아버님을 여의고, 어머님의 총애와 훈육의 덕으로 능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당시 도내의 명문교인 광주농업학교에 우수한 성적으로 진학하여 학생연대장과 씨름 선수로 명성을 날렸으나 4학년 때 일본제국의 학도병으로 강제 징집되어 졸업을 하지 못하였다. 강제 징집 후 중국 산서성 안읍지구에서 군사 훈련을 마치고, 2소대 분대장이 되어 대원을 인솔하고 중국 광동에 주둔한 일본군에 편입하기 위하여 이동 중에 교포들로부터 중경에 광복군이 주둔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동지 7명을 규합하여 작전지도와 수류탄, 권총 등 무기를 탈취하여 목숨을 걸고 탈출을 시도하였다. 탈출 즉시 발각되어 추격해 온 일본군과 교전하며 광복군의 주둔지를 향해 무작정 달렸으나 생소한 지형에다 몇 배나 더 많은 일본군을 당할 수 없어 대원 모두가 사살 또는 체포될 위기에서 때마침 찾아온 중국 74야전사령부 다온사 부대와 합세하여 일본군을 격퇴하고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하였다. 당시 약관(20세의 나이)에 광복군 총사령부에 입대하여 정치, 경제, 군사, 사상교육을 마치고 이범석 장군의 휘하인 총사령부 경위대에 배치되어 임시정부 요원들의 경호와 총사령부의 경비 업무를 수행하면서 수차례 전투에 참여하였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어 임시정부가 환국한 후에도 주화대표단으로 중국에 남아 중국과의 외교 문제 해결 및 망명 동포와 수시 연락을 취하는 등 특수한 임무를 수행하였고, 임시정부 요원 자녀들의 귀국 준비를 위한 한글 교육, 풍습 예절교육 등을 시키면서 이청천 장군을 호위하다가 1946년 6월 8일 이범석 장군의 인솔 하에 다시는 못올것 같았던 조국 대한민국 땅으로 귀국하였다. 귀국 후에 김구 선생님으로부터 조선경비사관학교(현 육군사관학교) 입학을 제의받았으나 홀로 계신 어머님 곁을 떠날 수 없어 사양하고 교직에 복무하다가 그만 두고 이 곳에서 농사를 지으시다가 1990년 1월 17일 지병으로 한 많은 생을 마쳤다. 명석한 두뇌와 투철한 애국정신을 가지고 명문교에 진학하였으니 태평한 시대를 만났더라면 국가와 민족을 위해 큰일을 하였을 것이고, 김구 선생님의 부르심을 받았더라면 국가의 큰 인물이 되어 기여한 공이 지금보다 더 했으련만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신 것이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돌아가신 후에야 그 공을 인정받아 1995년 8월 15일 건국 훈장 애족장(제 418호 대통령)을 수상하였으며, 대전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2-97묘역에 부인 김석자 여사와 함께 안장되었다. 평소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애국심, 그리고 고향 발전에 대한 애향심이 남달랐기에 고인이 된 지금도 대한민국의 무궁한 발전과 함께 고향 효산리의 발전과 주민들의 행복을 빌고 계시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