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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회종 선생은 전남 화순(和順) 사람이다. 화순군에 잇는 이서(二西)공립보통학교에 재학중인 1936년에 일제의 민족차별교육과 조선학생에 대한 노역(勞役)동원에 반대하여 동맹휴학을 주도하였고, 또 동교의 일인(日人)교장을 쫓아내는데 앞장섰다. 그후 이러한 이유로 국내에서 진학이 어렵게 됨으로써 도일(渡日)한 그는 동경 소재 정칙중학교(正則中學校)에 입학하였는데, 1937년 7월에 항일의식을 적은 일기장이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40여일 동안 구금되었고 동교를 퇴학당하였다. 그 뒤 다시 일본 천엽현(千葉縣) 소재의 명륜중학교(明倫中學校)에 들어갔는데, 이때에는 항일단체인 「라비트그룹」의 간행물인 〈전쟁과 평화〉에 항일기사를 기고하면서 항일활동을 벌였다. 그런데 1939년 8월에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귀국하는 도중 그러한 사실이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9개월간 구금된 상태에서 곤욕을 치르다가 1940년 5월에 집행유예로 풀려나왔다. 이 일로 그는 또 퇴교를 당했다. 그후 다시 일본에 건너간 그는 1943년 9월에 명치(明治)대학을 졸업하였다. 이무렵 일제는 소위 학도병 지원을 강요하면서 조선인 학생을 그들의 전선으로 끌어내고 있었는데 이때 이를 피해 만주로 갔던 그는 그곳에서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후 본국으로 송환되어 소집영장을 받았으나 신분증을 변조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고향 후배인 박진철(朴眞哲)의 하숙에 기거하면서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1944년 5월에는 동지 11명과 함께 항일결사 성도회(醒道會)를 조직하고, 동회의 회장으로 활약하였다. 동회의 주요활동은 동포학생들을 상대로 민족독립사상을 고양시키는 것과 학병지원 반대 등이었으며, 한편으로는 군수공장에 근로동원된 회원을 통하여 비밀문서를 입수하여 폭탄제조 계획도 세웠다. 그런데 1944년 9월에 동회의 활동이 일본 헌병대에 발각됨으로써 그는 피체되었다. 피체 후 삽곡(澁谷) 헌병대로 끌려가 2개월간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1944년 11월에 소압(巢鴨)형무소에 이감되었는데 1945년 8·15광복으로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