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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의사(義士) 라은 서공(蘿隱 徐公)이 세상에 계실때엔 현감(縣監)이나 목사(牧使)께서 예(禮)로 맞이하고 안부(安否)를 물으며 고관(高官)이나 재상(宰相)들이 시문(詩文)을 서로 주고 받고 어려움을 물었으며 돌아가심에 사림(士林)들은 의적비(義蹟碑)를 세워 공경하고 본보기로 삼으며 자손(子孫)들은 삼산정(三山亭)을 건립하여 사모하니 아! 아름답도다. 이미 보고 느낌이 많거늘 하물며 또 족친(族親)들이 장차 유적비(遺蹟碑)를 세워 써 경모하여 더욱 오래매 더욱 잊지 아니한즉 공(公)께선 과연 무슨 명절(名節)과 훈업(勳業)이 있어서 백세(百世)토록 썩지 아니한 복록이 있는 것인가 하노라. 공(公)의 휘(諱)는 상룡(相龍)이요 자(字)는 사필(士必)이요 라은(蘿隱)은 자호(自號)이다. 이천서씨(利川徐氏)는 신라아간(新羅阿干)인 휘 신일(神逸)에서 계출(系出)되고 정민공(貞敏公) 휘 필(弼)은 태사내의령(太師內議令)이요.장위공(章威公) 휘 희(熙)는 태보내사령(太保內史令)이니 고려조정(高麗朝廷)에 등용하여 번열을 이루어 고관대작이 대대로 끊이지 아니하고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 휘 강(岡)은 호(號)는 송담(松潭)이다.성균관 대사성(成均館 大司成)으로 불교(佛敎)를 배척하다가 임금의 뜻을 거슬러 옥중(獄中)에서 피해를 당하니 이 세조조(世祖朝)의 명신(名臣)이니 공(公)의 14세조(世祖)가 된다. 조(祖)는 영보(永輔)니 호(號)는 후계(厚溪)요 고(考)는 광순(光淳)이니 호(號)는 계은(溪隱)이니 모두 문행(文行)이 있고 비(○)는 나주임씨(羅州林氏)니 태갑(泰甲)의 따님이다. 공(公)께서 기골(氣骨)이 걸특하고 재지(才智)는 총명하여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혀 문리(文理)가 일찍 성취하여 의심난 곳을 발견하여 질문한 것은 문득 노성(老成)들을 놀래게 하니 부형(父兄)께서 원대(遠大)한 그릇으로써 기대하였다. 자라서 연사(蓮史) 문공(文公) 재풍(載豊)의 문하에서 수학(受學)하면서 경전(經傳)의 깊은 뜻을 더욱 연구하고 자사(子史)나 백가(百家)의 서(書)까지 섭렵하지 않은 것이 없어서 조예가 해박하니 사우(師友)들이 극히 권장하고 추켜세웠다. 송사 기선생(松沙 奇先生)을 사사(師事)하여 중화(中華)를 높이고 되놈을 물리친 존양대의(尊攘大義)를 얻어들으니 명성(名聲)이 원근(遠近)에 자자하였다. 능주목사(綾州牧使) 김승집(金升集) 서완순(徐完淳)이 불러 맞이하여 자문하고 향음례(鄕飮禮)가 있을 때면 반드시 맞이하여 빈례(賓禮)로 대접하였다.일찍이 유경(遊京)할제 심순택(沈舜澤)과 김홍집(金弘集)과 정범조(鄭範朝) 제상공(諸相公)을 종축하여 시문(詩文)을 주고 받음이 많이 있고 교의(交誼)가 심중하니 공(公)의 문격(文格)과 필치(筆致)를 가상히 여겨 자질(子姪)들의 학업(學業)을 도왔으며 사진(仕進)함을 권하였으나 선비의 풍습이 굽을 것을 보고 개연(慨然)히 공동묘지(共同墓地)의 걸인(乞人)같이 여겨 조금도 개의하지 아니하였다. 그 송담선조(松潭先祖)께서 충간(忠諫)하다가 사사(賜死)를 받고 아직까지 신원(伸寃)하지 못한 것을 통한하여 일향사림(一鄕士林)으로 더불어 누차 상소(上疏)를 하고 누차 발이 부르트게 대궐에 호소하여 마침내 복관(復官)되고 건사(建祠)할 명(命)을 무릅쓰니 이 어찌 지성(至誠)이 지극한바에 신인(神人)의 감응을 감동하여 얻은 것이 아닌가. 이에 제종족(諸宗族)과 협의하여 심력(心力)을 다하여 성산사(星山祠)를 건립(建立)하여 사림(士林)으로 하여금 향사(享祀)케 하였다. 또 각처선산(各處先山)에 석물(石物)을 갖추어 묘역(墓域)을 수식하며 위토(位土)를 마련하여 세향(歲享)을 넉넉하게 하였다. 본래 의암(毅庵) 유인석(柳麟錫)으로 교분(交分)이 있더니 고종병신년(高宗丙申年)에 의암(毅庵)이 충북제천(忠北堤川)에서 의거(義擧)한 소식(消息)을 듣고 공(公)께서 수백(數百) 의병(義兵)을 모집하여 의막(義幕)에 가서 병사(兵事)를 계획하고 호서(湖西) 영남(嶺南) 등지에서 왜적(倭敵)을 쳐서 누차 승전하여 공(功)을 세우고 원주(原州) 장산(長山)에 이르러 전패(戰敗)하였다.뒷일을 도모하기 위하여 의암(毅庵)은 요동(遼東)에 들어가고 공(公)은 연남(燕南:현재의 北京)에 들어가 원세개(袁世凱)를 만나 방략(方略)을 주선하였으나 일을 이루지 못함으로 3년(年)만에 귀국(歸國)하고 인하여 송사선생(松沙先生)을 뵈니 선생(先生)께서 악수(握手)하고 기뻐하며 이르기를 군(君)을 보니 의암(毅庵)을 보는 것과 같도다. 군(君)의 충의(忠義)가 가상하도다 하고 시일절(詩一絶)을 주니 이르기를 병신년(丙申年)의 의절(義節)은 특히 고고(孤高)하니 동기(同氣)이기에 죽지 아니한 나를 서로 찾아왔구려. 연남(燕南)땅에 응당 형가(荊軻)의 무덤이 있으리니 호협한 기골(氣骨)이 지금까지 무량(無恙)하든가 아니하든가라고 하였다. 을사년(乙巳年)에 보호조약(保護條約)이 이루어짐을 듣고 망북(望北)하고 탄식하며 이르기를 안 어지러움이 이미 깊으니 밖에 도적을 뉘 능히 막으리요 하고 이로부터 성산산중(星山山中)에 자취와 빛을 감추어 송풍(松風)불고 라월(蘿月)비친 사이에 노닐고 경전(經傳)을 보듬고 읽으며 후진(後進)을 개도함으로 자정계(自靖計)를 하였다.병인년(丙寅年)에 순종황제(純宗皇帝)께서 승하하심을 듣고 망곡단(望哭壇)을 싸서 초하루 보름에 통곡을 폐하지 아니하며 읍궁시(泣弓詩)를 지어 풍천지통(風泉之痛:작은 나라의 서러움)을 드러내고 깊은 근심으로 날을 지내다가 돌아가셨다. 저술한바 시집(詩集)은 상자속에 있어 아직 간행하지 못했다. 아! 공(公)께서 초야(草野)의 한낯 포의한사(布衣寒士)로써 의병(義兵)을 일으켜서 일은 비록 이루지 못하고 뜻을 비록 펴지 못하였으나 능히 그 충의(忠義)를 다한 것은 가(可)히 후세(後世)에 말이 있을 것이며 복관(復官)하여 조상(祖上)을 높이고 건사(建祠)하여 혈식(血食)을 누려 능히 수백년(數百年) 펴지 못한 원한(寃恨)을 폈으니 또한 자손(慈孫)됨에 부끄럽지 아니하니 어찌 다시 의심할까. 첨족(僉族)이 상의하여 장차 비(碑)를 세워 유적(遺蹟)을 표(表)하려 할세 상호(相晧) 상철씨(相輟氏)가 문중(門中) 여론을 수렴하여 비명(碑銘)을 나에게 청하기에 사양할 수 없었다. 명(銘)하여 가로되, 아! 송담(松潭)으로 현조(賢祖)를 함이여 곱고 아름다운 기혈(氣血)을 이어받았도다. 재주는 어릴 때부터 발췌함이여 송사문하(松沙門下)에서 얼마나 봄과 눈을 오래했는가.제천(堤川)에 의기(義旗)가 들날임이여 생(生)과 의(義)를 판단하고 피를 마셨다오. 호서(湖西)에서 영남(嶺南)에서 힘을 다해 싸움이여, 왜적은 담이 떨어지고 거북처럼 움추렸도다. 장산(長山)에서 한번 패(敗)한 것을 하늘에 물음이여, 당랑(螳○)이 수레를 막은 것을 어찌하리. 의절(義節)이 고상하다는 표창한 글이여, 송사선생(松沙先生)의 춘추필법(春秋筆法)일세. 사당(祠堂)이 성산리(星山里)에 높음이여, 왕(王)이 이르기를 급암(汲○:옛 直臣)같이 고지식하다 하고 복관(復官)하였네. 소나무 여러 덩굴 어루만지며, 자호(自號)함이여, 깊은 골짜기에 곤궁함을 견디어 내기를 즐거워하네. 저 삼산(三山)의 티고 밝은 곳을 바라봄이여, 한 정자 새가 놀라 날은듯 하여라. 의적비(義蹟碑)가 고향에 높이 슴이여, 아! 행인(行人)들이 손가락으로 가르키고 공경하리라. 1991(경오)년 전주(全州) 이진백(李鎭白) 글을 짓다. 추진위원장 서형구(徐炯球) 위원 서상호(徐相皓) 서상철(徐相輟) 삼가 비를 세우다. 출처 : 지역정보포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