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敎育(교육)과 啓蒙(계몽)이 時急(시급)하므로 育英義塾(육영의숙)을 設立(설립)하고 特(특)히 晩學徒(만학도)에게 新學問習得(신학문습득)의 機會(기회)를 주어 數(수) 많은 英才(영재)를 養成(양성) 하였다. 또 言論抗爭(언론항쟁)에 눈을 돌려서 東亞日報綾州支局(동아일보능주지국)을 開設(개설)하고 仁村(인촌) 金性洙(김성수) 古下(고하) 宋鎭禹(송진우) 先生(선생) 等(등) 名士(명사)를 招請(초청)하여 啓蒙講演會(계몽강연회)를 開催(개최)하고 靑老年(청노년)들의 體育(체육)을 위하여 各種運動競技(각종운동경기)를 장려하고 演劇團體(연극단체)까지 招致(초치)하여 州民(주민)의 文化啓蒙(문화계몽)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先生(선생)의 이 같은 눈부신 活動(활동)으로 州民(주민)들의 抗日精神(항일정신)과 文化意識(문화의식)이 크게 昻揚(앙양) 되었는데 日帝(일제)의 奸惡(간악)한 兇計(흉계)로 州民(주민)에게 阿片吸煙(아편흡연)이 隱然中傳播(은연중전파))되어 其害毒(기해독)이 莫大(막대)하므로 先生(선생)은 阿片中毒者(아편중독자)들을 徹底(철저)히 啓蒙團束(계몽단속)하여 마침내 州內(주내)에서 阿片吸煙(아편흡연)을 根絶(근절)시켰고 한편 從來(종래)의 陋習(누습)으로 學童(학동)들이 常民階級(상민계급)의 子弟(제자)와 同學(동학)하기를 拒否(거부)하므로 先生(선생)은 앞장서서 이들을 說得(설득)하여 同學(동학)하게 하므로 階級打破(계급타파)의 先驅的示範(선구적시범)을 하였다. 그리하여 이 같은 熱烈(열렬) 한 抗日獨立運動(항일독립운동)으로 乙丑年(을축년) 西紀一九二五年에 日警(일경)에게 逮捕(체포)되었는데 그들의 苛酷(가혹)한 拷問(고문)에도 끝내 屈(굴)하지 않고 드디어 白紙送廳(백지송청)으로 西大門刑務所(서대문형무소)에서 四年의 獄苦(옥고)를 치렀다. 出監後(출감후) 拷問(고문)에 依(의)한 得病(득병)으로 己巳年(기사년) 西紀 一九二九年八月八日에 四十歲(사십세)를 一期(일기)로 別世(별세) 하였다. 未亡人(미망인) 崔氏(최씨)는 至誠(지성)으로 三男三女(삼남삼녀)를 養育(양육)하여 훌륭히 成人(성인)시킨 後(후) 壬子年(임자년) 西紀一九七二年 十二月十一日에 八十七歲(팔십칠세)로 永眠(영면)하였다. 長男(장남) 圭瓚(규찬)은 先丈(선장)의 遺志(유지)를 이어서 大學(대학)때에 有名(유명)한 反帝抗日運動(반제항일운동)으로 獄苦(옥고)를 치르기도 했으며 其後(그후) 醫學博士(의학박사)로 全南大學校大學院長(전남대학교대학원장)으로 歷任(역임)했고 次男(차남) 圭琿(규혼) 三男(삼남) 載善(재선)이다. 社會(사회)에 奉仕(봉사)하고 있다. 슬프다. 先生(선생)은 祖國(조국)의 光復(광복)을 못본채 千秋(천추)의 恨(한)을 품고 長逝(장서)하였으나 그 高邁(고매)한 人格(인격)과 熱烈(열렬)한 憂國至誠(우국지성)은 靑史(청사)에 燦然(찬연)히 光輝(광휘)를 發(발)할 것이며 國民(국민)에게 不滅(불멸)의 龜鑑(귀감)이 될것이다. 뜻을 모은 우리 紀績碑建立委員會(기적비건립위원회)는 先生(선생)이 남기신 功勳(공훈)을 永遠(영원)히 기리기 爲(위)하여 여기 이 碑(비)를 세운다. 己丑西紀一九八六年五月 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