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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다. 거사당일 광주 관찰사의 해산령이 있었으나 왕명에만 응할것이오 봉강지신은 지휘할바아니라고 거절하였다. 정오가 못되어 왜병이 포위해 온다는 보고가 있자 선생께서 결전일사하려던차에 왜병이 아니라는 전갈이 온것이다. 이 소식을 들으시고 진위대군과 싸우면 동포끼라 상잔하는것이니 차마 그럴수 없다하여 퇴거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병은 방포하여 의병들이 모두 해산되고 최후까지 12인이 선생을 따라 결사하기를 맹세할뿐이었는데 이곳에 배향된 문공달환 양공 재햐는 즉 그중의 2인이시다.이후 선생과 12의사는 모두 일병에 끌려가니 기히 혹형을 받고 선생은 마침내 대마도에까지 압송되었으나 필경은 순절하시었다. 환장시에 원근사민이 분곡하지 않은이가 없었으니 이는 면암선생 한분의 슲음이 아니고 가위 온 국민의 슲음이었다. 이때 둔재 문공은 혹형으로 걷지 못해 업혀서 노상에서 실성통곡하고 옥고여에 선생의 뜻을 지켜 후생을 교육하였으며 화은 양공은 당시 장독으로 반구시에 집불치 못하여 재기때 ??해 추곡하고 비분강개지회로 여생을 마쳤으며 백헌 이공은 면암선생과 노사 기선생의 문하에 왕래하면서 성학지진과 대의소재를 깨달아 당시에 동의하려하였으나 마침 병으로 참여치 못함을 지한으로 여기다가 선생의 순국소식을 듣고 통곡하다가 쓸어져 불기하였으며 백암손공은 역시 선생의 문인으로 송사등과 벗이 되어 도의를 강마하더니 대부인 휘 진주갑에 추복3년하여 효성이 적적하고 세황에 추휼하고 환난에 구조하는등 인문이 높았으며 신암박공은 면암께 집현한 후매세춘춘에 진갈핟거니 선생반장에 설위통곡하여 조복심상하고 경술에 문변통곡하고 위선에 빵분하고 자제자매에 균토분재하고 휼린에 능산하되 자봉은 박하게 하니 칭송과 애장이 부절하였다. 오호 장하도다. 이제 제공의 사적을 팔피건데 모두가 면암선생의 문인으로서 역서의에 참여하고 역순적수학하여 국가장망지추에 일엽청기를 보는듯 하여 열성조의 배양사람이 불허함을 보여주었다. 이것으로 면암선생의 교훈이 위대함과 아울러 선생의 연원이 바름을 알수가 있겠다. 이제 그 선생과 제자를 춘추사에 함께 봉향하니 그의의와 감회가 새롭다. 이에 돌에다 이 사실을 기록하고저 불령에게 글을 청하니 사문후학으로서 일찌기 면암선생을 존모하던처지인지라 감히 불문으로 사양치 모하거니와 선생대의는 이미 청사에 빛나니 췌언을 요치않고 제공 사적도 행장과 묘비에 갖추어있기에 이와같이 그 대개만을 약술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