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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국가대란에 진심갈력해서 호국하다가 부드기 지하면 살신성인하고 혹은 둔적해서 후생교육으로 후일회복을 모의하는 것이 사대부의 도리이다. 조선말에 양이왜적이 유린강토할제 거의도적에 벽계문하의 활동이 가장 크신분은 면암 최익현선생이시고, 면암선생의 거의중에서 가장 큰것은 또한 순창거의라 할것이다. 춘산사는 즉 당시 거의에 선생을 모시고 문인으로 참여하였던 둔재 문공 달환 화은 양공 재해와 둔적교학하던 백헌 이공병섭 백암 손공영열 신암 박공준발등 제현을 배향한 곳이다. 오호라 면암선생께서 상소진정하여 제주 흑산등지에 유배하다가 최후로 을사동에 토오적소를 올렸으나 비답이 없자 팔도사민에 포고문을 전하고 익년 2월에 가묘를 하직하고 호남으로 향발하여 천여의병을 모집하고 판서 관찰사들에게 국난에 동참할것을 요구하였으나 이에 상응하는 이가 없으니 이 어찌 한탄치 아니하겠는가? 그러나 조선조가 양사오백년에 한 사람도 지력을 내어 토복할 수 없다면 어찌 부끄럽지 않은가 내 비록 팔질에 가까우나 신자도리를 다할뿐이다 하시고 거의 할 뜻을 상소하고 열군에 격문을 전하고 일본정부에 배의16죄를 고하고 순창에 주둔하여 전투를 대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