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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문 출처 : 남도여행 길잡이 그 사람의 절의(節義)가 아름다운 유적을 알고자 한다면 반드시 역사에서 고징을 찾아야 할 것이다. 대범 사람들의 사업과 행적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할 만한 것들이 만일 초야에 묻혀버려 수록하지 않는다면 애매하여 후세에 고징을 찾을 수 없는 것이니 어찌 걱정하지 않겠는가. 삼가 살펴보니 라은 서공(蘿隱 徐公)의 이름은 상룡(相龍)이고 자(字)는 사필(士必)이니 자질이 뛰어나고 모습이 깨끗하여 재주는 민첩하여 보통에서 뛰어 났다. 기송사(奇松沙) 선생에게 학문을 닦아 뜻을 들으면 즉시 감복하였으므로 깊은 칭찬을 받았으며 글을 읽다가 국가민족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 구절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책을 덮고 감탄하였다. 그 당시 국사가 말로 잘못된 것을 목견하시고 항상 울분을 품고서 서울에서 노닐제 정범조(鄭範朝) 김홍집 등 정승들과 더불어 우정이 두터워 학문을 강론하며 의문점을 질의하였다. 혹자가 과거(科擧)에 응시할 것을 권자하니 공(公)께서 말씀하여 가로되 요즈음 선비들이 의례껏 의복을 갖추고 요로(要路)에 있는 고관대작을 찾아가 비록 종기를 빠는 일을 하면서도 부끄럼을 알지 못한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부끄럼을 깊히 느끼고 과거장(科擧場)에 나가는데 뜻을 끊었다 하시고 미련없이 물러오셨다. 병신(丙申) 1896년에 섬나라 오랑캐가 우리나라 육지를 침범하자 해와 별들이 어둠속에 묻혀버렸고 하늘과 땅이 번복되었다. 5백년 종묘사직의 운명이 위태로워 경각에 달려 있으니 나라의 난리가 어느 때보다도 이 때가 매우 극심하였다. 각처에 의사(義士)들이 중국 로중련(魯仲連)처럼 바다에 빠져 죽는다는 뜻을 품었는데 나 역시 이 나라 백성으로 어찌 편안히 앉아서 나라 망한 것을 지켜보고만 있을 것인가. 대범 사람들이 세상에 태어나 당연히 출세 입신(立身)하는 것으로 근본을 삼은 것인데 임금이 어려움을 당하면 나의 삶을 죽음으로써 보답하여야 하는 것이니 자신을 바르게 세우는 일이 바로 이날에 있다. 사람이면 누구가 죽음이 없을 것인가 만은 마땅히 죽어야 할 때 죽는 것이 인간의 근본이다 하시고 곧 제천(堤川)사는 의암 유인석(毅菴 柳麟錫)과 더불어 죽고 사는 것을 함께 하기로 하고 여러 마을에 통고문(通告文)을 보내어 선비들과 합심하여 의병을 모집하였는데 그 수효가 그의 수백명에 이르렀으며 활쏘기와 말타기를 연습하였다. 이때 관동(關東)지방에는 군사의 위엄이 이미 떨쳐 의병들의 목소리가 연이어 높았다. 호남과 호서 등지는 비록 늙고 피폐한 몸이지만 기세얻어 전지를 향해 달려가기로 하였다. 이리하여 의병을 이끌고 호서(湖西)에 있는 적을 토벌하여 누차 공(功)을 세우면서 강원도 원주(原州)와 장산(長山)에 이르렀다. 저들은 무기를 휘두르고 우리 의병은 맨주먹을 휘두르기 때문에 약한 세력으로 강한 세력을 대적할 수 없어 사태가 여의치 않자 통분하여 죽으려 하다가 의암(毅菴)은 중국 요동으로 들어가고 공(公)께서는 중국 남쪽 연남(燕南)으로 들어가 전략을 주선하였으나 어찌할 수가 없어 3년 뒤 본국으로 돌아왔다. 공(公)께서 송사선생(松沙先生)을 뵙자 흔연히 손을 잡고 말씀하여 가로되 그대의 충의(忠義) 정신을 보니 가상하네 그대를 만나보는 것이 마치 의암(毅菴)을 만나보는 것 같다며 다음과 같은 시(詩)를 지어주면서 「적원(赤猿(赤猿은 丙申 1896년을 이름.) )의 해 기상과 충절 특별히 고상하여, 기상이 같아 죽지않은 나를 서로 찾았구려. 연남(燕南)에 응당 형경(荊卿(荊卿은 중국 俠客인 荊軻를 이름.) )의 무덤이 있어, 유골이 지금까지 아무 탈 없을 거야.」서로 눈물을 머금고 이별을 하였다. 1905년 을사(乙巳) 협약이 체결되었다는 정보를 듣고 북쪽 서울을 바라보며 통곡을 하시고 이때부터 소나무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다래넝쿨에 비치는 달빛사이를 오가면서 드디어 자신의 깨끗한 삶을 계획하였기에 학행(學行)과 절의로 조정에 천거하여 온능참봉(溫陵參奉(온능(溫陵)은 중종왕비 신씨(愼氏)의 묘를 이름.))에 발령되었다. 이천서씨(利川徐氏)는 신라때 벼슬이 아간(阿干)이고 이름은 신일(神逸)이라는 분이 시조되는 분이며 여러 대를 내려와 이름은 강(岡)이고 아호는 송담(松潭)이며 벼슬은 대사성(大司成)인 이 분은 세조(世祖)임금때 불교(佛敎)를 배척하다가 세조들의 뜻을 거슬려 사약을 받았으니 이 분은 중세 현조(中世 顯祖)가 되는 분이다. 증조의 이름은 유린(有麟)이요 아호는 청계(淸溪)이며 조부의 이름은 영보(永輔) 아호는 후계(厚溪)이고 아버지의 이름은 광순(光淳)이요 아호는 계은(溪隱)으로 문장과 학행(學行)이 있었으며 어머니 나주임씨(羅州林氏)는 태갑(泰甲)의 따님이다. 철종(哲宗) 임금 임술(壬戌) 1862년 10월 14일에 출생하여 갑신(甲申) 1944년 10월 26일에 돌아가시니 거주하신 마을앞 삼산등 유좌(酉坐)에 장례를 모셨으며 배위는 연안김씨(延安金氏)와 탐진최씨(耽津崔氏) 두 분이다. 5男을 두었으니 큰 아들은 병준(丙駿)이요 다음은 병구(丙龜) 셋째는 병남(丙男) 넷째는 병학(丙鶴) 다섯째는 병호(丙虎)이다. 손자에 류(○) 방(芳) 수(秀)는 병준(丙駿)이 낳았고 정민(廷珉)은 둘째 병구(丙龜)가 낳았으며 정령(廷領)은 셋째 병남(丙男)이 낳았고 정묵(廷默) 정조(廷造) 정훈(廷勳) 정철(廷喆)은 넷째 병학(丙鶴)이 낳았으며 정봉(廷奉) 정혁(廷赫)은 다섯째 병호(丙虎)가 낳았다. 이하 후손은 기록하지 않는다. 아 ~ 공(公)은 일찍이 스승의 문하(門下)에 들어가 대의(大義)를 터득하였고 절도(節度)를 닦아 규구(規矩)를 밟았다. 국가를 걱정하고 선조를 사모하는 마음이 항상 간절하여 송담공(松潭公) 원통함을 펴기 위해 누차 상소를 올려 사당을 세우라는 윤허를 받아 선비들로 하여금 제사를 모시게 하였고 각처(各處)에 있는 선조 묘소에 비석을 세웠으니 위대하기만 하다. 대범 사업을 이루지 못하고 뜻을 펴지 못함은 하늘의 뜻이니 어찌할 수 없다. 명(命)의 직분이 없었지만 충의(忠義)의 정성이 이처럼 독실하여 뒷세상 관리들의 본 보기가 되는데 만족하다. 일찍이 건물 하나를 세워 거처하려 하였건만 결과가 없이 돌아가셨으며 그 아들 병준(丙駿)이 정자 하나를 짓고 이름하여 가로되 삼산정(三山亭)이라 하여 아버지의 뜻을 계승하였으니 가히 충효를 겸전하였다고 이르겠다. 또 선비들과 더불어 그 얼을 그리며 계(契) 하나를 설립하고 이름하여 가로되 심성계(尋成契)라 하여 뒷날의 계획을 삼았다. 경운 기우채(耕雲 奇宇采) 성재 문제용(誠齋 文濟龍) 방은 임호응(芳隱 林鎬應) 록파 고광헌(綠坡 高光憲) 등 도내(道內) 큰 선비들의 찬미를 담은 기록이 많으니 이는 그분의 사전(史傳)이라고 할만 하여 장차 후세에 좋은 평가가 있을 것이다. 공(公)의 둘째아들 병구(丙龜)가 힘을 합하여 심성계원(尋成契員) 및 선비들과 협의하여 자금을 거출하여 돌을 다듬어 그 의(義)로운 행적을 표시할제 그 사손 유군(嗣孫 . 君)이 나에게 글을 요청하기에 사양을 하다가 하는 수 없이 우(右)와 같이 서술을 하고 다음과 같이 명(銘)을 짓노라. 송담공(松潭公)께서 남기신 음덕(蔭德)으로, 공(公)과 같은 후손을 두었네. 일찍이 송사(松沙)의 문인(門人)이 되어, 입으로 전(傳)하여 주신 말씀 마음속으로 외우셨어. 늠늠하기 만한 의(義)로운 기상은, 나라를 걱정하는 충성이요. 추모하는 마음으로 돌을 다듬었으니 이는 공(公)께서 남기신 정신일세. 이 비문을 읽어보면, 수만명 모두가 칭송하리라. 무신(戊申) 1968년 1월 상순에 능주향교전교 여흥(驪興) 민홍기(閔弘基) 삼가엮다. 능주유림 비를 삼가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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碑文 출처 : 남도여행 길잡이 欲知其人之節義懿蹟必於史傳徵之矣凡紀人之事行而可傳 於後者若沈淪草野湮沒不收曖昧不著後無證焉安得不慨然謹 按蘿隱徐公諱相龍字士必姿質傑然儀容粹然穎悟絶倫學于松沙奇先生 聞義卽服深蒙奬○讀書至殺身成仁處必掩卷歎賞見時事日非常懷鬱憤 遊於京師與鄭範朝金弘集諸相公交誼甚重講討質疑或勸之以科試公曰 今見士夫例以曳○於要路雖咀○咀痔而不知愧心切恥之絶意場屋慨然 而退丙申海寇陸梁日星晦沒天地飜覆五百年宗祀危在項刻邦國喪亂孰 有甚於此時各處義士懷蹈海之志吾亦率土之臣民豈可恬然坐視乎夫人 生於世當以立身爲本急難君父報生以死立身之事正在此日人孰無死死 於當死人之本職乃與堤川柳毅菴麟錫爲死生之計輪告於村閭合謀於儒 胥募聚義旅殆至數百鍊習弓馬是時關東軍威己振義聲迭興○南湖西等 地雖老○跛○皆增氣而欲赴於是擧兵討賊於湖西累捷立功而至原州長 山彼兵我拳弱不敵强事不該痛憤欲死因而毅菴入遼東公入燕南周旋方 略無奈三年而返國謁松沙先生欣然握手曰君之忠義可尙見君如見毅菴 贈詩一絶曰赤猿氣節特孤高同氣相尋不死吾燕南應有荊卿墓俠骨至今 無恙無相與飮泣而別聞乙巳脅約望北痛哭自是○○於松風蘿月之間遂 爲自靖計以學行節義薦除溫陵參奉利川氏以新羅阿干諱神逸爲鼻祖累 傳至諱岡號松潭官大司成世祖朝以斥佛○旨賜死是爲中世顯祖也曾祖 諱有麟號淸溪祖諱永輔號厚溪考諱光淳號溪隱有文行○羅州林氏泰甲 女哲宗壬戌十月十四日生卒于甲申十月二十六日葬于所居星山村前三 山嶝酉坐原配延安金氏耽津崔氏擧五男長丙駿次丙龜三丙男四丙鶴五 丙虎長房孫 ○芳秀次房孫廷珉三房孫廷領四房孫廷默廷造廷勳廷喆五 房孫廷奉廷赫餘不錄噫公早登師門透得大義進修節度 . 蹈規矩恒切於 憂國慕先以松潭伸寃累度上言蒙褒建祠士林俎豆各處先墓具其石儀偉 矣哉夫事之未成志之未伸天也無一命之職而忠義之誠如是其篤足以爲 後世人臣之模楷也曾欲構一室以爲捿息之所未果而卒其肖胤丙駿築一 亭而顔之曰三山以繼父志可謂忠孝俱全矣又與士林追慕其義設一契而 名曰尋成以爲後日之計耕雲奇宇采城齋文濟龍芳隱林鎬應綠坡高光憲 省內巨匠亦多揚美是其爲史傳也將有辭於後世矣公之次胤丙龜合謀於 尋成契員及士林出資治石以表義蹟而其嗣孫○君要余一言辭不獲己而 敍次如石銘曰松潭之蔭有孫如公早登松門口傳心誦凜凜義氣憂國之忠 追慕伐石寔出於公觀此貞珉萬口咸頌 歲戊申元月上浣 綾州鄕校典校 驪興 閔弘基 謹撰 綾州儒林 謹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