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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달환 선생은 면암 최익현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늑결되자 면암은 각 지방의 유림인사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고자 고관들에게 함께 거사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반응을 얻지 못하였다. 1906년 3월 전라북도 태인에 있는 돈헌 임병찬과 제휴하여 의병운동의 거점을 태인·순창 일대로 정하였다. 그리하여 1906년 6월 4일(음력 윤 4월 13일) 태인 무성서원에서 강회를 개설하고 유생들의 지지를 호소하였다. 이때 문달환은 면암 의진에 입대하였다. 면암 의진은 일본 정부에 글을 보내어 침략주의 일본의 16개 죄목을 들어 성토하고 정읍·순창·곡성 등지로 진군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관원이나 민중이 호응하여 병력이 3백여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의병의 이러한 세력확대와 함께 일본군의 많은 병력과 여러 차례의 전투가 있었으며, 19일 의병진은 옥과로 향하던 도중 적측의 제지를 받아 순창으로 회군, 유진하였다. 그 이후 광주 진위대 소속 관군의 강압과 회유로 많은 군사들이 흩어졌으나 문달환은 문인 12인과 함께 면암을 호위한 채 진중에 그대로 앉아 적을 꾸짖다가 잡혀 서울로 호송되었다. 이 때 면암을 위시하여 임병찬·고석진·김기술·임현주·유종규·조우식·조영선·나기덕·이용길·유해용·최제학 등이 함께 체포되었다. 재판 결과 태형 100도에 처해지고, 약 2개월간 옥고를 치른 후 1906년 8월 석방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