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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다를까. 1905년 을사조약이 일본에 의해 강제로 체결되고 면암 선생은 그 이듬해 전라도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켜 6월 순창에서 항전하시다가 체포되시어 대마도로 유배되신 끝에 단식으로 순절하시어 온 겨레의 통곡 속에 고국으로 돌아오시니 선생은 부산포에까지 나가시어 스승의 시신을 손수 모시었다. 1910년 한일합방의 조종이 울리니 선생은 구국대열에 앞정서시어 오늘은 포천에서 내일은 고창 등 전국 각지를 동분서주하시던 중 1915년 구국투사 박상진 선생과 더불어 광복단을 결성하시고 고성후 양재홍 양기중 공 등 호남의 동지 규합과 의병에게 군자금과 군량미를 대시다가 1918년 5월 피체되시니 대구복심법원은 선생의 항일투쟁이 너무나 조직적이고 강렬하여 확산될 것을 우려 15년의 중형으로 손과 발을 묶어버리니 이 어찌 한민족의 수난이 아니리요. 불과십개여월 뒤 2천만 동포의 피맺힌 절규와 오열속에 터진 을미만세를 옥중에서 들으셨으니 선생이야말로 응어리진 민족정기에 불을 지핀 점화자요. 3.1운동을 태동시킨 선구자라 아니할 수 없도다. 살과 뼈는 찢기우고 부서지는 고문의 옥살이 11년 3개월을 굴하심 없이 배달의 긍지와 선비의 품위로 이겨내시었으니 이 또한 민족정신의 지표로 후세에 길이길이 빛나오리라. 형기를 마치신 선생은 만신창이의 몸으로 고향에 돌아오시었으나 가족은 풍진되어 찾을 길 없으시어 외동따님이 사는 이곳 안영마을에 기거하시며 16여년간 왜경의 감시 속에서도 오직 후세의 교육에 전념하시다가 한 맺힌 조국광복을 목전에 두시고 파란 많은 생을 마치시었으니 때는 1945년 1월 24일이라. 선생의 타계는 한민족의 비통이오나 인명유한에 부치고 필설로 다하지 못할 장구한 옥고 또한 접어두고라도 안타깝기 짝이 없는 것은 선생이 집필하신 금같은 많은 문집과 유고마저 왜경에 몰수되고 다만 독립투사들의 추모기와 북유록 등만이 남았을 뿐이니 일제의 잔인무도함과 선생의 기구한 운명을 가히 증하고도 남음이 있도다. 다행히나마 1977년 일제하의 재판기록이 챙겨지고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이 추서되어 선생의 나라사랑하심과 민족사랑하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