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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는 왜장 금평산 등 수십명의 적을 죽이는 전과를 올렸다. 동년 10월에는 조경환과 함평 광주 등지에서 동년 12월에는 박민홍 부대와 합류 나주 남평 무안 등지에서 항전을 계속하였으며 멀리 안규홍 전해산 등과 연합전선을 펴기도 하였다. 1919년 6월에 이르러 일군의 대토벌작전으로 심한 타격을 입은데다가 순종의 해산 명령이 있게 되자 공은 울분을 씹으며 재기를 다짐하고 잠시 구세군에 의지하고 있다가 동년 9월 20일 장흥 내양리에서 왜병에게 잡히는 바가 되었다. 광주 재판소의 대구 공소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나는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싸운 의병이지 폭도나 살인 강도가 아니라고 항변함은 물론 갖은 협박 공갈 회유를 물리치고 왜병이 주는 음식물에 혀를 끊어 피를 토해 거절하니 적도 이를 감탄하고 두려워하였으며 끝까지 옥중 투쟁을 하다가 1910년 7월 1일 스물 여섯의 젊은 나이로 형장에서 순절하기에 이르렀다. 공께서 가신지 70년만에 정부에서는 독립유공자로 추서하였으나 어찌 그것이 거룩한 죽음의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는 길이 되었다 하겠는가. 오늘에 와서 친족들과 향리를 비롯한 원근의 유지들이 뜻을 같이 하고 이어서 국가보훈처의 지원까지 받아 공의 행적과 민족혼을 기리는 충절비를 그가 태어나고 성장한 옛터에 세우게 됨은 오로지 고인의 넋을 위로하면서 후진들을 일깨우고자 함에 있을지니 그 뜻이 깊고 아름답다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서기 1989년 기사 10월 일 전주인 이명한 근찬 장흥인 고광렬 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