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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우리 역사상 가장 침체한 시기에 굳굳히 민족을 지키다가 외로이 가신 독립지사 하산 김철 복현선생이 잠들고 계시다. 선생은 한말 풍운이 일기 시작한 고종27년 1890년 10월 7일 전라도 나주읍 금성산하 한 농가에서 부 김해김공 창곤씨와 모 함평이씨의 5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정직 성실하여 한문 공부에도 열심하였다. 6,7세에 을미의병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의 엄친과 장형이 의병장과 투사로 참여하여 일제와 싸우다가 나주 감영에서 함께 순절하니 8세에 고아가 되였다. 여기에 충격을 받은 선생은 평생 항일독립운동에 몸바치기로 작정하였다. 망국의 쓰라림을 딛고 10년 을미년 3월 1일 민족항쟁의 대운동이 터지자 선생은 전남방면 거사의 청책을 맡고 최흥종 국기열 강석봉 한길상 김강 최한영 남궁혁등 동지들을 규합 도내 각처에서 수천 수만의 대중을 동원 조직하고 독립만세를 진두에서 지휘하였다. 왜경에 체포되여 모진 고문과 옥고를 치르면서도 성어 김철의 무쇠처럼 굽힐줄을 몰랐다 원래 성품이 강직견고하고 용감극렬하신 선생은 초지일관 항일독립의 정도를 추진하였다. 부조의 감화로 장자 재호는 상해에 망명하여 임시정부의 요원으로 활용하였댜. 을유년 해방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는 등 여생을 조국광복과 통일의 성업에 바치려고 하였지만 남북분단의 불운과 중구혼란의 시세에 맞지아니하여 광산군 비학향촌에 묻처 청빈한 생활을 하디가가 을유년(1969년) 6월 21일 80세로 서거하였하였다. 유사이래 우리민족은 외체의 침략을 많이 받았지만 빛나는 문화문족의 전통과 긍지를 살려 자랑스러운 국토수호에 죽기로서 나선 까닭에 그때마다 고난을 극복해왔다. 근대 제국주의 일본의 침략만 그렇지 못하여 마침내 수십년 망국의 큰 치욕을 당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이 비상시기에 선생이 걸으신 굳건한 투사로서의 일생은 어떠한 현창보다 값지고 뜻있는 것이며 가장 훌륭한 지도자로 길이 추앙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