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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에 가담하여 보국안민의 도를 제창하였고 계속하여 반봉건 반제투쟁을 전개하였다. 그 후 선생은 향리 남산에 서당을 개설하여 후진양석에 진력하면서 창의의 뜻을 더욱 굳혀오다가 이대극과 숙의 병오 4239년 봄에 원근 각처에 격문을 띄워 대마마치산에서 기병하였다. 이대극을 맹주로 추대하고 선생은 부장이 되어 당일 읍으로 추격하여 이를 점령하고 병기를 탈취 무장하였다. 그후 정미4240년 9월 오산에서 거병한 기삼연과 문수산에서 합진하여 성장 고창 법성등지에서 공을 세웠고 동년 10월 장성 유탕전에서 일군을 격파하는 대공을 세웟다. 그러나 일군에 비하여 병기와 훈련이 부족하였으므로 이대극대장에게 보고한 후 백여명의 부대를 인솔하고 석대산으로 들어가 병기주조와 병사훈련으로 전력을 재정비하였다. 동년 12월 27일 기삼연부대가 담양 추월산성에서 패하고 다음날 28일 기대장이 포로가 되었다는 비보에 접한 동 부대는 일사보국을 거듭 맹세하고 대오를 재정비하여 익년4월 소창전 고산전 5월 8일 불갑산전 9월 12일 고창석곡전 10월 20일 백곡전 10월 27일불갑산전 11월 4일 소장 장자산전 등 수십차의 전투에서 승전하였다. 기유4242년 4월 3일 이대극대장이 자객에게 우해되자 동부대를 이끄는 의병장이 되었다. 이때 대구에서 주둔하고 있던 일본헌병 도?부대가 9,10월에 걸쳐 전남토벌작전을 벌려 남도출신 103위의 의병및 의병장들이 순절하였다.이 순국하신지 76년만인 병인4320년에 민족의 이름으로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세월은 흘러 세 세상사 덧없으나 대의만은 빛나리니 선생의 우국충절을 길이 전하고자 우리들의 뜻을 모아 여기에 비를 세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