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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하면서 청년회를 조직 지하운동을 펴다가 일경의 추적으로 정체가 드러나 쫒기는 몸이되어 1925년 만주로 건너가 신민부 부위원장겸 별동대장의 책무를 맡아 김죄진장군과 더불어 재만동포의 항일규합과 투쟁전개에 전력 만주 중동선 일대의 일본영사관과 왜경찰관서를 수없이 습격 위세를 떨렸고 친일주구단체인 하루빈 조선인민회 토벌과 악명높았던 해림시민회장 배두산제거에 큰 공을 세웠으며 권총과 탄약을 구입 본영에 보내는등 하르빈에 침투 맹활약을 하다가 동년말 밀정의 탐지로 중일합동군의 기습을 받아 동지 이영선 최진만 채세원 박병찬등과 함께 체포되었고 1931년 여순고등법원에서 사형언도를 받아 1932년 11월 4일 38세를 일기로 망국의 한을 품은채 이역만리에서 단두대의 이슬로 순국하셨다. 열사의 구국애정은 헛되지 않아 그 후 12년만에 광복이 되었고 1963년 3월에 대한민국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으며 이어 1966년 정부의 배려로 그 동안 밀장되었던 유해를 국립묘지에 안장하였다. 나라와 겨례를 위해 한 목숨을 기꺼이 바친 의사의 충의정신은 겨레의 등불이 되어 영원히 빛나리니 이에 우리 모두의 뜻을 모아 이 비를 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