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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극 선생은 을사조약이 늑결되어 일제의 국권침탈이 가속화되자, 1906년 봄 영광에서 거의하여 일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듬해 여름 기삼연이 장성에서 거의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9월에 수백명의 군사와 다수의 군비를 가지고 고창 문수사에 유진하고 있던 기삼연을 찾아가 의진을 통합한 뒤 기삼연을 맹주로 추대하고 그 휘하에서 도포장 겸 군기감이 되었으며, 호남창의회맹소를 설치하여 대한매일신보에 격문을 보내어 거의명분을 천명하였다. 같은해(1907) 10월에는 일군이 야음을 틈타 은밀히 의병진을 포위하고 있음을 뒤늦게 알고 군사를 좌우로 분산시켜 협공케 하여 일군에게 타격을 가하였다. 이어 법성포·무장·고창·영광 등지을 전전하며 연전연승을 거두고 일인 추방을 목적으로 활동하다가 장성에서 회군하고 말았다. 동년 10월 11일 기삼연과 함께 무장 고산에 주둔하고 있던 일군을 유인, 공격해 타격을 가하였다. 이어 불갑산 연실봉에서 진을 구축하고 일군과 싸워 승리하였으나, 계속되는 전투로 전력이 크게 소모되어 11월에는 장사산으로 후퇴하여 진용을 정비하였다. 그 뒤 일군은 현상금을 걸고 그를 체포코자 하였는데, 1909년 4월 3일 잠든 사이에 현상금을 노린 배반자에 의해 참살됨으로써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