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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기울고 있었다. 김기봉은 일어서지 않을 수 없었다. 1905년 을사년 11월 일제는 을사늑약으로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았다. 김기봉은 부친이 성재 기삼연 등과 일으킨 의병운동에 뛰어들었다. 아버지는 너는 나이도 어리고 외아들이니 집으로 돌아가라고 권유하였다. 기삼연도 너는 김씨집안의 외아들이니 집으로 돌아가 후사를 잇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김기봉은 아버님께서 진중에 계시는데 아들이 혼자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라며 듣지 아니하고 각지에서 수백명의 의병과 많은 군량을 모아 왜적토벌을 지원하였다. 1907년 정미년 8월 일제는 정미7조약을 강요하여 한국군대를 해산하였다. 김기봉은 그해 9월 수련산에서 부친이 기삼연 등과 설치한 호남창의회맹소 회합에 동참하여 함께 피를 뿌리며 하늘에 맹세하고 왜병소탕에 몸을 불살랐다. 왜병은 한국의 무고한 양민을 괴롭히고 살림을 불태우는등 만행을 서슴치 않았다. 김기봉은 부친을 따라 영광, 무장, 고창, 법성포, 장성, 함평 등지에서 병량을 모으로 적정을 탐지하며 왜병과 싸우고 또 싸웠다. 그러기를 몇 달 김기봉은 고창, 흥덕, 안현 전투에서 아버지를 호위하며 선두에서 분전하다가 적탄에 맞아 장렬하게 순절하였다. 1907년 12월 13일 나라를 되찾겠다는 큰 뜻을 펴지 못하고 아버지를 지키겠다는 간절한 소망을 다 이루지 못한 채 김기봉은 스물하나의 짧은 생을 거두었다. 그의 죽음을 온 세상이 애도하며 칭송하였다. 왜병의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