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募金(모금)하여 萬歲運動(만세운동) 後(후) 다시 上海(상해)로 密航(밀항), 臨時政府(임시정부)樹立(수립)에 積極(적극) 參劃(참획)하여 議政院(의정원) 全羅道(전라도) 代議員(대의원), 交通部(교통부) 次長(차장), 財務(재무) 法務委員(법무위원), 會計檢査院長(회계검사원장), 軍務部(군무부) 財務部(재무부) 判任所長(판임소장) 等(등)을 歷任(역임)하였고, 特(특)히 李奉昌(이봉창) 尹奉吉(윤봉길) 兩大義擧(양대의거)에는 當時(당시) 軍務部長(군무부장)으로서 白凡(백범) 金九(김구) 先生(선생)과 함께 主導(주도)한 事件(사건)으로 倭敵(왜적)의 追擊(추격)이 急迫(급박)해져서 그의 親知(친지)인 피치 牧師(목사)의 집 二層(이층)에 白凡(백범)과 같이 避身(피신)했다가 杭州(항주)로 옮겨 淸泰(청태) 第二旅(제2려) ○三二號(32호) 呂先生(려선생)의 宿所(숙소)에 臨時政府(임시정부) 辦公處(판공처)를 設置(설치)하고 一九三三年(1933년) 五月(5월) 十六日(16일) 첫 國務會議(국무회의)에서 白凡(백범)과 자리를 바꿔 財務(재무)를 맡아 粉骨碎身(분골쇄신) 繼續(계속) 鬪爭(투쟁)타가 過勞(과로)에 지쳐 一九三四年(1934년) 六月(유월) 十九日(19일) 四十八歲(48세)를 一期(일기)로 長逝(장서)하니 臨時政府葬(임시정부장)으로 岳王廟(악왕묘) 後麓(후록)에 묻히셨다. 于今(우금) 五十年(50년)이 넘도록 遺骸(유해)를 옮겨 오지 못한 채 一九六二年(1962년) 三一節(삼일절)에 政府(정부)에서 建國功勞勳章(건국공로훈장)을 追敍(추서)하였다. 또 長姪(장질) 晳(석)은 靈光普通學校(영광보통학교)를 卒業(졸업) 後(후) 從弟(종제) 德根(덕근)과 함께 上海(상해)로 亡命(망명)하여 學業(학업)과 倂行(병행) 獨立運動(독립운동)에 投身(투신), 十九歲(19세) 때 咸平(함평) 尹海光(윤해광)과 함께 羅州(나주) 文平(문평)에 潛入(잠입)했다가 日警(일경)에 被逮(피체), 開城(개성) 少年監(소년감)에서 二年(2년) 獄苦(옥고)를 치른 後(후) 다시 密航(밀항)하여 臨政(임정)外交部(외교부) 秘書長(비서장), 韓人靑年黨(한인청년당) 理事長(이사장), 丙寅義勇隊長(병인의용대장) 等(등)으로 獻身(헌신) 努力(노력)하였고, 特(특)히 尹奉吉(윤봉길) 義擧(의거)때는 爆彈(폭탄)을 提供(제공)한 嫌疑(혐의)로 佛租界(불조계) 內(내)에서 逮捕(체포)되어 中佛日(중불일) 三角(삼각)紛爭(분쟁)을 惹起(야기)케 하였고, 本國(본국)으로 送還(송환)되어 一九三四年(1934년) 十二月(12월) 二十七日(27일) 大邱(대구) 法廷(법정)에서 裁判(재판) 中(중) 脫走(탈주)하였다가 다시 붙잡혀 五年(오년) 懲役(징역)에 八月(8월)이 加刑(가형)되었고, 滿期出獄(만기출옥) 後(후)에는 또다시 豫備檢束(예비검속)으로 淸州刑務所(청주형무소)에 拘禁(구금)되어 爾後(이후) 十數年(십수년)의 獄苦(옥고)를 치른 後(후) 解放(해방)이 되자, 道建國準備委員(도건국준비위원), 光復會(광복회) 理事(이사) 等(등)으로 活躍(활약)하였고, 一九六八年(1968년)에는 建國勳章(건국훈장)이 授與(수여)되었으며, 一九七三年(1973년) 七十二歲(칠십이세)를 一期(일기)로 逝去(서거)하니 光復會葬(광복회장)으로 國立墓地(국립묘지)에 安葬(안장)되었다. 姪(질) 德根(덕근) 亦是(역시) 獨立運動(독립운동)에 加擔(가담)하여 爆彈事件(폭탄사건)으로 尹義士(윤의사)가 現場(현장)에서 逮捕(체포)되자 佛租界(불조계) 內(내) 僑胞(교포)들에게 그 事實(사실)과 避身(피신)할 것을 알리고 돌아 오다가 日警(일경)에 붙잡혀 本國(본국)으로 押送(압송), 二年(2년) 餘(여)의 獄苦(옥고)를 치렀다. 그 또한 一九七七年(1977년) 十二月(12월)에 大統領(대통령) 表彰狀(표창장)이 授與(수여)되었으니, 이 어찌 叔父(숙부)인 先生(선생)의 指敎(지교)로 薰陶(훈도)된 義血家風(의혈가풍)이 [출처] 여름휴가[35]-불갑사 들머리 김 철 선생 기념비|작성자 열린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