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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을호 선생 연보 1910년 음력 10월15일 영광읍 백학리에서 태어나 영광보통학교 영광중학원, 서울중앙고등보통학교 경성약학전문학교를 졸업함. 1933년 영광읍에 호연당 약국을 개업하고 지역 주민들에게 민족 의식을 고취하고 한편 중앙의 신문과 학술지에 동무 이제마의 사상의학설을 처음으로 연재, 동서의학의 종합을 주장하는 논문을 발표하여 학계의 주목을 받음. 1937년 영광 체육단과 그 산하 갑술구락부 조직을 주도하여 민족의 각성을 깨우치는 독립 운동에 헌신하다가 9월13일 일경에 체포되고 목포 형무소에 투옥됨. 수형생활중 경학과 다산학에 심취함. 1945년 광복과 함께 교육을 통하여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자 사재를 출연하여 영광민립중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으로서 후학을 양성함. 1948년 광주의과대학병원 약국장에 취임하고 약제학을 강의하면서 동양의 철학과 한국의 문화를 연구함. 1952년 일본에 처음으로 주자학을 전수한 우리 고장의 유학자 강항선생의 간양록을 발굴, 번역하고 그 가치를 인정받도록 하는 등 언제나 애향의 일념으로 영광의 역사와 정신을 개발하여 향토 문화 발전에 크게 이바지함. 1955년 전남 대학교 문리과 대학 교수로 부임한 후 다산학 연구에 전념하면서 출판부장, 호남문화연구소장, 박물관장 등을 역임함. 1959년 다산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여 학계의 이목을 끌었으며 그 업적으로 연세대학교에서 연구비를 지원받아 다산경학을 전공함. 1967년 서울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다산학 연구의 선도자가 되었으며 1976년 정년을 맞이할 때까지 실학을 통하여 조선조 유학을 탐구함으로써 한국의 사상은 중국과 다른 독자성이 있음을 밝혀냄. 1978년 국립광주박물관 초대관장으로 취임한후 지역문화 발전의 초석을 마련하기 위하여 박물관대학을 개설하는 등 한국의 역사와 사상을 올바로 인식하게 함. 한편 실학사상 연구논문집 다산학보를 창간함. 1983년 다산학 연구원을 창설하고 원장으로서 다신계 문화교실을 열어 실학정신의 대중화에 진력함. 1987년 광록회장에 취임하고 자연을 살리기 위한 푸른생명가꾸기 운동을 펼쳐 환경의 소중함을 일깨움. 1998년 3월13일 89세를 일기로 영면할 때까지 일생을 하루같이 학문과 저술을 통하여 국학연구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우리 문학의 앞날을 밝히는 커다란 횃불이 됨 유족으로는 장남 원태와 성윤 정선 현영 정미 여란 등 2남 4녀를 두었고 묘소는 불갑면 봉동에 있음. 1999년 8월 15일 광복에 이바지한 공로로 정부로부터 국민훈장을 추서 받았으며 생전에 여러 차례 학술상과 자랑스러운 인물상 등을 수상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