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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수택 의병장 유래비 호는 남일(南一), 본관 청송(靑松), 1871년 2월 10일 함평군 월이면 정산리 신기마을에서 태어나 1908년 후반기와 1909년 중반기까지 이 고장의 의병사를 이끈 의병장이였다. 그는 1907년 11월 1일(음) 전남 각 지역에 격문(檄文)을 돌려 700여명의 의병을 규합하고 왜적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무리들에게 경유(警喩)하는 글을 띄우는 등 이곳 원산 덕동(옛지명 갓점, 笠店)에서 거의(擧義)하면서 1908년 2월 함평, 보성, 나주, 장흥 등지에서 수십차례의 격전과 기습작전으로 수많은 적을 사살하고 군기를 노획하였음은 물론 영암 사촌에서는 일본 금평산 대장을 살해하는 등 호남의병의 기세를 만천하에 떨친 지장(智將)이었다. 1909년 5월 1일 보성에서 작전 모사(謨士) 중 국왕의 의병부대 해산에 대한 조서를 고민하다가 만부득이 해산하고 능주의 풍치(현 화순군 청풍리와 이만리 소재)의 산속에 피신해 있다가 1909년 10월 9일 왜적 사다께대위가 이끄는 47명의 토벌대에 의해 체포되어 광주 감옥에서 대구로 옮긴 후 1910년 9월 1일 향년 39세에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 (서울 동작구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 1962년 국민장에 추서되고 광주공원에 그를 기리는 순절비가 건립되어 있다. 남일 의병장 의기결행시 초야의 서생이 갑옷을 떨쳐입고 바람타고 남도하니 말도 빨리 달리도다. 왜놈들을 모두 쓸어버리지 못한다면 모래밭에 죽어서 돌아오지 않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