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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一 沈守澤 義兵將 記念館(남일 심수택 의병장 기념관) 남일 심수택 의병장은 1871년 2월 10일 함평군 월야면 정산리 신기마을에서 심의봉(沈宜奉)과 진주강씨(晉州姜氏) 사이에 출생하셨다. 본명은 심수택(沈守澤)이오 호는 남일(南一)이며 본관은 청송(靑松)이다. 어려서부터 천성이 총명하고 성경과 현전을 배워 충효의 뜻을 깨닫고 사서삼경, 역학, 병서를 섭렵하여 무술의 묘법을 익힘으로 내일의 국난에 대비하셨다. 학식이 있어 훈장을 지냈으며 평택임씨(平澤林氏)와 혼인하여 3남 3녀를 두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선생은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세우고 1907년 호남창의회맹소에 가담하여 기삼연 의병장 휘하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08년 2월 기삼연, 김태원, 김율 등 수뇌부들이 순국하자 선생은 각 지역에 격문(檄文)을 돌려 의병을 규합, 함평 신광 원산리 덕동에서 거의(擧義)하면서 "나를 따라서 조국과 겨레를 지키자"고 외치시며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결성하였다. 1908년 3월 강진 오치동 전투를 시작으로 특히, 영암 사촌전투에서 일본군 평금산(平禁山) 대장을 사살하는 등 호남의병의 기세를 만천하에 떨친 지장(智將)이었다. 선생은 20여 전투에서 많은 적을 사살하고 일본 군경에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 전라도 지역의 대표적 의병부대로 성장한 심남일 의진은 안규홍, 전해산 의진과 접촉하여 호남동의단을 결성하고 연합투쟁을 전개하였다. 일제는 1908년 후반부터 선생을 체포하는데 혈안이 되어 남한대토벌 작전으로 11개 부대를 투입했다. 1909년 7월 순종의 의병해산조칙에 따라 의병을 해산하고 일본군의 집요한 추적을 피해 화순군 청풍면에 은거해 있다가 같은해 10월 선봉장 강무경과 함께 체포되어 광주 감옥에 투옥되었다. 그해 12월 대구 감옥으로 이감, 1910년 10월 4일 39세로 순국하셨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고 광주공원에 선생을 기리는 순절비가 건립되었으며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우리군은 의병장의 숭고한 애국충절을 기리고 후세들의 현충교육장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건립부지는 선생의 손자 심만섭(沈晩燮)이 기증하고 국비와 도비, 군비를 확보하여 기념관과 동상을 세우니 호국정신을 이어받는 전당이 되기를 바란다. 2010년 11월 30일 함평군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