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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은 일제강점기의 야만적인 민족 말살책에 온몸으로 항쟁하신 애국지사요. 평생을 후진양성에 헌신하신 참스승이셨다. 선생님은 함평군 월야면 월악리 못간(池邊)에서 정항모(鄭沆謨)님과 장흥고씨 사이에서 9남매 중 3남으로 1921년 7월 27일에 출생하셨으며 본관은 동래이시다. 선생님은 어려운 가운데서 청운의 뜻을 품고 1941년에 일본유학길에 올라 대판중학에 다니면서 일제의 식민통치와 민족차별에 분노하여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동지들과 조선독립청년단을 조직했다. 40여차에 걸쳐 독립투쟁을 벌이다가 1943년 3월 2일에 체포되어 악랄한 일제 경찰의 고문과 강압으로 고통을 겪은 후 다음해 1월 26일에 대판지방법원에서 2년 6월형을 선고받아 복역 중 1945년 8월 15일 광복으로 석방되셨다. 선생님은 귀국 후 나라를 부흥시키는 지름길은 인재양성에 있다는 생각으로 교육계에 투신해 1947년 광주북(성)중학교 수학교사로 부임하셔 온화한 인품과 자상하신 성품을 갖추신 훌륭한 선생님으로 헌신하셔 여러 학교에서 교사, 교감, 교장으로 봉직하시다가 해남중학교 교장을 끝으로 1986년 8월에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으시고 40년 가까운 교직 생활을 마치셨다. 선생님은 독립운동 사실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으시고 국민으로서 할 일을 했을 뿐이라 숨기다가 공직생활을 다 마치시고 인생을 정리하시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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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인 정진명(鄭鎭溟:전남대학장) 등 친지들의 간청에 못 이겨 독립유공자 신청을 허락하셔 1992년 8월 15일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으셨다. 공직생활에서의 어떤 혜택이나 자녀교육 및 취업에서의 특별한 우대를 받지 않으시려는 맑고 깊은 품위는 주위와 제자들의 존경과 흠모를 받으셨다. 선생님은 항상 웃는 얼굴과 자상하시고 따뜻한 보살핌으로 제자들과 주위 사람들을 어루만져 주셨고 일상생활에서도 빈틈이 없었으며 사랑이 넘치는 스승이셨다. 선생님은 후덕하시고 깊으신 정으로 사모님 이춘자(李春子) 여사님과 결혼하셔 5남 1녀를 두셨는데 장남 창영(昌泳)은 전남의대교수로 전남대병원 기획실장 마취과장을 역임했고 광주보훈병원장으로 봉직하다 정년 후 을지대병원에서 봉직하고 있으며 둘째 무영(武泳)과 넷째 용영(龍泳), 다섯째 호영(虎泳)은 회사의 중견간부로 근무했고 셋째인 딸 복숙(福淑)은 아버님의 뒤를 이어 수학교사로 봉직했고 여섯째인 오영(五泳)은 의과대를 나와 내과의사로 인술을 펴고 있다. 선생님은 2008년 9월 23일에 향년 87세로 서거하셔 대전국립현충원 제3묘역(애국지사 3-914)에 영면하셨다. 선생님의 애국정신과 훌륭한 교육자상에 감동을 받아 온 뜻있는 사람들이 선생님을 기리고 본받자는 뜻을 가졌지만 생존시에 말도 꺼내지 못하다가 세상을 뜨신지 10년이 지난 이제야 선생님의 현창사업을 추진하여 거룩하신 애국.애족사상과 참교육 정신을 길이길이 추모할 수 있게 되었다. 2019년 3월 2일 글 : 전남대 명예교수, 문학박사, 북성중 제자 이상식 앞글 : 서예가 우송 정흥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