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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규 선생은 전남 함평군 나산면 용두리 출신으로 본관은 선산이며 호는 만성재이다. 26세때 진사시에 급제한 선생은 일제침략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동학농민항쟁과 의병전선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한 우국지사였다. 1865년에 태어난 선생은 1887년 전라도 전주감시에 합격한 뒤 1891년 한성부김사에 이어 경과증광회시에 급제, 진사가 되었다. 국운이 기울자 대과준비를 포기한 채 향리에서 학문과 후학교육에 힘쏟던 선생은 1894년 척일양을 외치던 동학농민항쟁에 참여하여 춘주의리를 실천했다. 1905년 날조된 을사늑약에 결사반대하며 의병전쟁을 벌이고 있던 김태원의진에 가산을 쾌척하면서 참가한 선생은 함평.나주.광산등 각지를 순회하며 자금조달과 의병모집에 앞장섰다. 김태원의진은 1907년 기삼연의병장이 이끄는 호남창의회먕소의 선봉대로 출발하여 곳곳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린 대표적 의병부대였다. 호남창의회맹소는 구한말 후기의병에서 선구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던 호남의병의 본진이었다. 선생은 나산면 수상리 월현에서 왜적과 접전하다 중과부적으로 피체되어 혹형을 당하기도 했다. 1910년 나라가 망한 후 절의를 지키며 은거하고 있던 선생은 1919년 광무황제가 승하하자 동지들과 함께 마을 앞산 봉우리에 단을 세우고 북향 망곡하여 군신의 도리를 다하였고 3.1운동 소식에 국권이 회복되기를 염원하면서 '봄비 오고 꽃바람 부는 춘삼월. 외로운 밤 멀리서 온 손님 잠 못이루네. 북쪽에서 만세가 일었다는 새 소식 들려오니, 조선의 황위 회복되어 전과 같이 되어라'라는 시를 남겼다. 선생은 1935년 음7월 8일 오매불망하던 국권회복을 보지 못한 채 나산면 송암리 694번지, 이 자리에서 영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