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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의 한만수 이규갑 안상덕 나주의 이계술 동지와도 협력 인천 만국공원에서 한성정부 조직에 참가 결의하고 상해 임시정부요원으로 국내외를 연락하며 활동하시다가 그해 1919년 10월 26일 장성군 황룡면 월평리에서 기산도 김종택 동지와 3인이 함께 체포되어 광주검사국(지금의 검찰청)으로 송치 악독한 고문 취조를 당하고 재판에 회부되어 대구복심법원(지금의 고등법원)까지 이르러 2년 4개월이란 옥고를 치르시고 1922년 2월 19일 풀려나셨다. 또한 선생은 일제의 개성 강요에도 불굴 항일투쟁을 계속하시던 중 형기를 마치고 출옥한 동지 조사현 장정현 정기연 등과 지방에서 청년운동 농민운동 노동운동 등을 추진하면서 각 단체의 간부로 활동하셨으며 1924년 월남 이상재 선생이 추진하는 조선민주대학 발기위원으로 조선사회 단체 중앙협의회 함평대표로 1925년 장정현 김광 등과 같이 함평농민조합을 조직하고 농민의 복지운동을 전개하시다가 체포되어 또다시 3년의 집행유예를 언도받은 후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어 항시 보호 감찰소의 가택 수색과 업악 취조를 받아오면서도 불굴 일편단심 확고한 집념으로 초지일관 민족의 독립과 자유쟁취에 심혈을 경주하셨으나 조국통일의 한을 안고 후예에 2남 3녀와 미망인 김해 김일남 여사를 뒤로하고 1967년 1월 2일 세상을 떠나셨다. 그후 독립유공자 포상으로 1982년 8월 15일 대통령 표창장을 받고 또다시 1990년 12월 26일에 건국훈장 애족장에 서훈되셨다. 1985년 국가보훈처 후원으로 선생의 기적비 건립 추진위원회를 결성 위원장에 광산군수 이현호 부위원장에 함평군수 정병섭 위원에는 광산군 함평군 장성군 각계 인사들로 구성하고 기적비를 묘소에 세웠다. 묘소는 광산군 삼도면 양동리 선영하에 모셨다가 1988년 함평군 나산면 초포리 사촌 촌후로 이장하면서 기적비도 같이 옮겼다가 금년에 다시 새 돌에 각하여 세우다. 서기 2000년 11월 20일 세움 가족대표 장자 건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