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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 이인행 선생 의적비 지사 이인행 선생은 함평군 나산면 초포에서 재관공과 나주 임언규공의 따님 사이에서 맏아들로 1897년 7월 27일 태어나셨다 이름은 홍근 자는 인행 호는 삼역이시니 병조 정랑공 계일헌명룡의 7대손이시며 이조 정랑공 삼회재현의 5대손으로 지혜 총명하시고 성품이 강직한 분이셨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선생은 통분을 안고 조국광복에 헌신할 것을 결심 독립운동 대책을 도모하던 중 1919년 고종황제의 국상에 참례 곡반소에 입곡 후 호남인사들과 결속하여 손병희 외 32인의 독립선언문 선포식에 참여 인산인해를 이룬 애국시민들과 같이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시가를 행진하시다가 일군경에 포박되어 종로경찰서에 연행된 후 심한 고문으로 상해를 입고 석방되어 동지들의 구원으로 치료 후 전남장성 기산도 동지와 협력 한남수 동지가 주도하는 인천 월미도 대회에 참가 독립사상 고취를 목적으로 한 취지문을 작성 소지하고 각도별로 파견 전남북에 기산도(장성) 황병학(광양) 김종택(영광) 이인행(함평) 박은룡(장성) 민치환(고창) 김철(서울) 등이 파견되여 하향하니 때는 1919년 3월 16일이었다. 선생은 고향인 함평을 담당 조사현 송대호 정기연 모순기 동지들로 주동삼아 함평장날인 1919년 4월 7일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절규하며 시가를 행진케 하였으며 한편 해보면 거주 이윤상 월야면 김기택 정룡섭 장효섭 정재식 등과 연락 문장장날인 4월 8일 민중을 봉기시킨 바 일대는 유혈사태까지 빚게 되었다. 그 후 기산도 김종택 동지와 다시 만나 협의 끝에 당시 장성 황룡 면장과 내통하여 면사무소 등사판을 이용 독립선언문 수천매를 등사 전남북 전역을 순회 배포하고 독립사상을 고취 독립성금을 모금 상해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등 조국 광복에 공헌해 오면서 선생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