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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旅館(함평여관)을 경영하여 同志(동지)를 모아 國權(국권) 회복을 위한 擧事(거사)를 두루 모의 하니 그대로 光復(광복)을 위한 生活義兵(생활의병)의 출발이었다. 드디어 一九一九年(1919년)의 三一(삼일) 대운동 先生(선생)은 徐廷禧(서정희) 변호사와 더불어 분연히 일어서니 여기 앞장 서 結合(결합)한 人士(인사)로는 李達根(이달근) 崔暎均(최영균) 등 수십 명 이었는바 業種(업종)도 다양하여 農業(농업) 自營業(자영업) 간호원 이발사 목수 고용인들까지 함께 하였고 여기에 敎師(교사) 姜大年(강대년) 申義求(신의구) 등과 學生(학생) 李東運(이동운) 李琪浩(이기호) 등이 그 主役(주역)으로 合流(합류)하였다. 김복현 등 一千(일천)여 군중이 손에손에 太極旗(태극기)를 들고 萬歲(만세) 시위를 벌일 때 先生(선생)과 徐(서)변호사가 각각 東西(동서)의 선두에서 引導決行(인도결행)하였지만 간악한 日警(일경) 앞에 그 勢(세)는 衆寡不敵(중과부적)이었어라. 그만 萬歲(만세)의 군중은 무너지고 先生(선생)은 체포되어 憤淚(분루) 속에서 投獄(투옥)되고 말았다. 무서운 拷問(고문)이 연이어 혹독하였지만 先生(선생)은 조금도 굴하지 않고 一審(일심)에서 三審(삼심)까지 끈질기게 法廷鬪爭(법정투쟁)을 계속하니 고등법원에서 日帝(일제)를 매도한 先生(선생)의 그 도도한 웅변은 오늘도 우리들의 가슴에 울려 전한다. 그 당당한 抗辯(항변)도 소용없이 抗訴(항소)까지 기각되어 刑(형)을 받게 되니 혹독한 고문은 內腫(내종)이 되어 先生(선생)은 일시 병 보석으로 출감되었으나 병세가 다소 호전되자 다시 재 투옥되어 형기를 모두 마치고서 풀려 났다. 출옥 후 一九二七年(1927년)에 新幹會(신간회)에 들어가 水稅不納運動(수세불납운동) 등 국민저항운동을 벌였고 一九二九年(1929년)에는 長男(장남) 진설이 光州高普學生運動(광주고보학생운동)의 주모자로 앞장 섬에 先生(선생)은 이를 적극 지원하여 民衆大會(민중대회)까지 벌였으나 진설은 결국 체포되어 징역 六月(6월)에 四年(4년) 집행유예를 받았으니 그는 나와서 아예 세상을 등지고 入山(입산)하여 僧侶(승려)가 되고 말았다. 그 후 日帝(일제)의 학정과 要視察人物(요시찰인물)이라는 냉대 속에 빈곤마저 겹쳤지만 先生(선생)은 의연히 先世(선세)의 永思亭(영사정)에 書堂(서당)을 설치, 후학을 지도하는 한편 隣近(인근)의 갖가지 民願(민원)사항들을 도맡아 해결 후원하니 그 모습은 그대로 가난 속의 선비생활이요 생활 속의 의병정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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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九四五年(1945년) 광복의 기쁨으로 先生(선생)은 그 爲國愛民(위국애민)의 생활에 희망과 기대가 솟았지만 불의로 밀어닥친 六二五(육이오)의 전란에서 막내 진필마저 청년단장으로서 義擧(의거)하였다 그만 被禍(피화)를 당하니 민족적인 상처는 어찌 이다지도 先生(선생)에게 가혹하기만 하랴. 이 같은 傷心(상심)과 不運(불운) 속에서 一鄕祖國(일향조국)을 함께 憂國傷道(우국상도)로 嚴正(엄정) 지켜 보시다 一九七一年(1971년) 辛亥(신해) 二月(2월) 홀연 別世(별세)하니 享年(향년) 파란많은 八十八(팔십팔). 온 郡民(군민)과 鄕黨一圓(향당일원)이 함께 精誠(정성) 모아 社會葬(사회장)으로 받드니 幽宅(유택)은 바로 長安鼓瑟峙嶝癸㘴原(장안고슬치등계좌원). 때를 國步艱難(국보간난)의